삼척박씨 대종회(회장 박병호) 중시조(삼척박씨의 始祖) 춘제가 지난 3월27일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가성 시조묘정 현지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매년 3월 마지막 일요일에 실시하는 것으로 이날 행사에는 박석규·박충호 고문, 박성호 서울회장, 박호철 부산회장, 박한성 대구회장, 박대영 청년회장, 대의원, 박만금(동해) 등 전국의 종친 2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춘제에 앞서 박병호 회장은 “서울, 부산, 대구 등 경향각지에서 공 사간 바쁜 일정에도 참석 해 주신 종친여러분께 고맙다. 우리 종원들은 각자의 일정이 다 바쁘겠지만 일 년에 한번뿐인 시조(원경)님의 은덕을 기리는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주시길 다시한번 당부한다.”고 전했다. 매년 3월 마지막 일요일에 모시는 춘제는 정기총회를 겸하여 실시하는 것으로 박호정 사무국장의 경과보고, 박칠규 감사의 감사보고에 이어 박호정 사무국장의 결산보고를 끝으로 정기총회를 마무리하고 제를 올렸다. 제관으로 시조(부원군, 원경)의 춘제는 시조의 직계로 삼척박씨의 3파(정헌공파, 성제공파, 참의공파)가 참여했다. 초헌관에는 정헌공파, 아헌관에 성제공파, 종헌관에 참의공파가 제관이 되어 제를 올리고 춘제를 마쳤다. 전국에서 온 종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복을 하고 준비한 돼지고기 등 각종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 축제의 행사를 마무리했다. 삼척박씨의 시조 척성부원군 박원경(陟城府院君 朴元鏡)(1322-1383. 죽숙왕 9년-우왕9년)은 三陟朴氏(삼척박씨)의 시조이다. 처음 이름은 원경(元鏡)이며 家乘에는 원경(元慶)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는 우호(禹浩)이다. 충숙왕(忠潚王) 9년(1322) 전리사총랑(典理司摠郞) 박순(朴淳)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사림랑(仕林郞) 검교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 박지문(朴之文)이다. 아버지 박순은 조부 박지문의 셋째 아들이다.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셋째아들 박언신(朴彦信)의 후손이다. 박원경이 삼척부원군(三陟府院君)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그 후손들이 삼척을 관행으로 삼아 삼척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박원경은 공민왕(恭愍王) 2년(1353)에 등과하여 권지전교정자(權知典敎正字)에 임용되었다가 사농사승(司農寺丞) 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 이부시랑(吏部侍郞) 지합문사(知閤門事)를 역임하였다. 공민왕의 배원정책으로 관제개혁에 적극 참여하여 개성윤(開城尹)에 임명되었다. 개성소윤으로 있을 때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할 조짐을 보이자 왕이 직접 그의 관사(관사)를 세 번이나 찾아가 방책을 논의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공민완 8년(1359) 12월에 홍건적의 모거경(毛居敬)은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였다. 이것이 홍건적의 1차침입이다. 홍건적은 서경(西京:평양)을 함락하였으나 다음해 2월에 도원수 이승경(李承慶)에 의하여 격퇴됐다. 공민왕10년(1361) 10월에는 반성(潘誠)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등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재침해왔다. 이들은 지금의 자비령(慈悲嶺) 방책을 부수고 개성으로 진군하자 공민왕은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몽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급기야 개경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해 12월에 고려는 복주에서 군사를 정비하여 한편으로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으로 삼아 적을 막게 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각도에서 20만 명의 군사를 모아 안우(安祐)를 상원수(上元帥)로 삼았다. 이처럼 정비를 마친 고려군은 다음해인 공민왕 11년(1362) 1월에 개경으로 진공하여 홍건적을 대파하고 홍건적의 지도자 사유(沙劉) 關先生(관선생)을 죽임으로서 홍건적은 압록강 건너로 모두 퇴각하였다. 이와 같은 국란을 당하여 왕의 신임이 두터운 박원경은 국가주요 정책의 논의 상대가 되었으며 군사를 모집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민왕 12년(1363)에 호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척성군(陟城君)에 봉군되었다. 척성은 삼척(三陟)의 다른 이름이다. 공민왕 12년(1365)에 밀직부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밀직판사사(密直判司事)에 승진했다. 공민왕 20년(1371) 권력을 전횡하던 신돈(辛旽)의 제거에 참여하였다. 우왕(禑王)에 등극한 뒤에도 재신(宰臣)으로서 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우왕 9년(1383)에 완이 한양에서 송도로 귀경할 때에 박원경의 집에 머무르며 군신(群臣)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해 별세하니 62세였다. 삼중대광(三重大匡)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에 추증되고 척성부원군(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박원경은 천성이 곧고 바르며 풍모가 엄격하고 의연하였으며 경서(經書)를 연구하여 고전(古典)과 병서에 통달하였다. 또한 정국이 소란할 때는 스스로 물러나 후학양성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아들 준제(準提)는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를 지냈는데 고려복벽운동에 연루되어 고초를 격었다. 이후 후손들은 삼척을 관행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번창하여 가문을 크게 빛내고 있다. 묘소는 강원도 삼척 오류동이었는데 국가 산업단지개발로 후손들의 세거지인 함양으로 1991년 8월 20일에 천묘하였으며 2007년 10월 경기도 파주시 고려통일대전에 배향됐다.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환여승람(朝鮮換與勝覽)」,「소원록」박호철 김해지사장 phc02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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