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완연하다. 동장군의 위용도 살포시 고개를 내민 꽃망울 앞에 꼬리를 감추고 있다. 아내와 함께 등승골 채마밭에 갔다. 들판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이 장날이라 묘목, 종자, 농약구입, 농기계수리 등 봄 농사를 위한 준비를 위해 시장에 간 모양이다. 간 김에 사람들을 만나 안부도 묻고 어제 발표된 4.13국회의원 선거에 나설 새누리당 후보에 대하여도 이야기 할 것이다. 이 지역은 새누리당 정서가 강하여 국회의원은 새누리당 공천이 바로 당선인 셈이다. 정치권에서는 친박, 비박, 친노, 비노 등으로 나뉘어 조선시대의 사화를 방불케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지리산 천왕봉, 왕산과 필봉산이 가까이 보인다. 사람 사는 세상 말도 탈도 많다. 잠시 상념에 젖어 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시정에 부는 바람과 관계없이 안분지족하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 한 후배가 우리고장에 살만한 동네가 어디라고 생각하는지 물어 답변을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예로부터 일 대방, 이 개평, 삼 효리 또는 일 지곡 이 수동, 삼 백전 이라고 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문화시설이 있는 읍네를 선호하지만 휴천면 목현 마을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동네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동네가 만들어낸,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오래된 마을일수록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사랑과 감동이 있는 이야기는 기록된다.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는 묘비 없는 무덤과 같다. 입으로만 전해지는 이야기는 치열했건 화려했건 간에 아침 안개나 운무처럼 흩어지게 된다.
목현은 함양읍과 휴천면을 잇는 팔치재(일명 팥치재-폿도재)에 붙은 아늑한 마을이다. 팔치(八稚)고개는 모양이 복치(伏稚), 은치(隱稚), 비치(飛稚) 등 여덟 마리의 꿩이 앉아 있는 형상과 흡사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목현은 면소재지로 읍이 가까울 뿐 아니라 인물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조선 연산군때의 금제(琴齊) 강한(姜漢)선생이 처음 입향하였으며 그 뒤 중종때 죽산 박씨와 선조때 진양정씨가 차례로 들어와 지금도 대성을 이루고 있다. 금제 선생과 그의 손자 개암 선생의 묘소가 마을 북쪽에 있다. 이 마을에는 진양정씨 화산공께서 뜻있는 젊은이들에게 호연지기의 장(場)으로 가꾼 구송대(九松臺)가 있다. 구송의 정식 명칭은 반송(盤松)이지만 원줄기가 아홉 개로 갈라져서 자란다고 하여 구송이라 부르게 되었다. 주변에 축대를 쌓고 이곳을 구송대라고 부르는데 천년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소고대와 운정대가 있고 죽산박씨 문중의 후손 사지(師智)의 처 최씨 열녀비와 사적비가 있다.
고대(孤臺) 정경운 선생이 쓴 고대일록(孤臺日錄)이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선생의 11세손인 정용재가 소장하고 있다. 정경운은 당곡(唐谷) 정희보의 손자로 선조25년(임진. 1592년)4월 23일부터 광해군 원년(1609년)10월 7일 까지 함양을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활동을 비롯하여 자신의 체험과 주변상황 및 당시 보고 들은 국내사정 등에 대한 약 17년간의 기록으로 당시의 사회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목현은 인물이 많이 난다. 근래에도 5명의 사법고시 합격자가 배출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누에처럼 생겨 일명 누에설이라고 하는 산줄기가 휘감고 있는 마을의 후손들이다. 공교롭게도 합격자가 모두 여성이다. 호사가들의 입은 누에 실을 뽑아내듯 목현마을에 대한 말의 성찬이 이어진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잠두(蠶頭)부분에 누에가 잎을 먹고 섶을 올릴 때 쓰는 뽕나무가 무성하였다고 한다. 크고 무성한 뽕나무는 상서로움을 상징하기도 한다. 삼국지에도 뽕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탁현의 누상촌(樓桑村)이 유비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누상촌의 유비가 살던 집 울타리 옆에는 일산(日傘)을 닮은 아주 커다란 뽕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누에가 먹은 모든 뽕나무 잎새들이 드디어 변화를 일으켜 비단실이 되면 창조의 과정이 시작된다. 벌레전체가 비단실로, 육체전체가 영혼으로 변하는 것보다 더 절박한 의미나 감미로운 고민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이다.
목현은 번성기에는 230여 호의 큰 마을이었으나 여느 농촌의 마을처럼 사람들이 반짝이는 도시로 흘러가서 지금은 100여 호에 지나지 않는다. 세월에 따른 사회적 흐름은 귀농, 귀촌이다. 각박한 도시를 떠나 조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골 전원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도시로 나갔던 사람과 살만한 곳을 찾아 드는 사람이 하나 둘 모여드는 것은 마을을 살찌고 기름지게 할 수 있는 뜻 깊은 일이 아닐까? 뽕나무가 무성하던 목현 마을이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나 주민도 좋고 사회도 좋은 ‘뽕도 따고 임도 보는’가슴 뿌듯한 마을로 발전하였으면 하는 바램이다. *마을 자랑 찾기에 관심이 계신 분은 연락을 바랍니다 연락처:lc34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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