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2막 3장을 열어보자. 방바라방방 방바라방방♬ 방바라방♬ 태조 이성계 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은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6명.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은 방번 방석 2명. 나이가 든 이성계는 왕비 신덕왕후 강씨와 정도전의 지원 아래 장남이 아닌 배다른 형제 막내 방석을 왕권 후계자로 세자책봉 했다. 본부인의 아들 6명이 물먹은 것이었다. “와, 나 미쳐! 이게 말이 돼? 6대2로 붙었는데 막내 방석이가 복권 당첨 돼? 아버지 미친 거 아냐? 장남 아래 죽죽빵빵 빵바라방방인데 마지막 빵을 찍어? 함경도에서 이름 날렸던 활쏘기 명사수 맛이 갔네. 아, 형님들 뭐라 얘기를 해 보셔.” 다섯째 이방원이 씩씩 열을 올렸다. 말에서 떨어져 몸져누운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아들들이 병문안하러 가는 날이었다. 부인 민씨가 남편 이방원을 은밀히 불러 말했다. “여보, 오늘 갑자기 나 아이유 노래 한 곡 부르고파. ♬어쩜 이렇게 하늘은 더 파란 건지/ 오늘따라 왜 바람은 또 완벽한지/생략/아이쿠 하나 둘 I`m in my dream/ It`s too beautiful beautiful day/ Make it a good day/ Just don`t make me cry/ 이렇게 좋은 날♬.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에요. Good day. 좋은 날. 여기 금가락지 팔아 창과 칼과 갑옷을 준비해놓았어요. 부디 성공하세요.” 마침내 1398년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라고 부르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방원은 심복 책사 하륜과 이숙번의 군사 지원 아래 정도전 방번 방석을 차례로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명분 쌓기로 우선 둘째 형 방과를 2대 정종 왕으로 앉혔다. 사실 정종은 바지 사장이었고 실권은 방원 일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자 왕 자리를 은근히 넘보던 야심가 네 번째 형 방간이 불만을 품고 1400년 정월,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박포가 방원이 형 방간을 죽이러 온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다. 한양 시내에서 두 패거리들은 며칠 동안 시가전을 벌였다. ‘박포의 난’이라고 부른다. 2차 왕자의 난도 이방원이 승리했다. 마침내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나 앉고 이방원은 조선 세 번째 왕 태종으로 추대되었다. 형제들의 피와 피로 쟁취한 킬러본능의 레옹 태종 이방원. 그의 카리스마는 조선 7대 왕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와 자주 비교된다. 태종은 젊었을 때 과거까지 급제한 문무를 겸비한 왕이었다. 왕이 되자 반란을 우려한 그는 개인이 거느리고 있던 병사를 몰수하고 왕만이 병사를 가지도록 하는 사병혁파를 실시했다. 어느 얼짱 학생 : 제가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요 50문제 중 딱 50개 틀렸는데요 다음에서 태종의 업적이 아닌 것을 골라라 한 문제가 있었거든요. ①6조직계제와 왕권강화 ②청계천 공사 ③사병혁파 ④신문고 설치 ⑤우편함설치. 정답은 ②번 맞지요? 청계천 공사는 이명박 대통령이 했잖아요. 얼짱 선생 : MB 그분은 청계천을 만든 게 아니라 홍수 범람을 막기 위해 태종이 만든 청계천을 복구한 사람이다. ⑤번 우편함 설치는 현대의 일이다. 어느 얼짱 학생 : 그럼 「6조 직계제」가 뭐에요? 얼짱 선생 : 「6조 직계제」는 왕 아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의정부가 있고 그 아래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6조가 있다. 하지만 태종은 의정부 3정승의 권한을 축소하고 왕이 직접 6조 장관들에게 명령을 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왕이 담당 실무자 6조 장관들에게 직접 명령하고 보고를 받으니 정승은 고개만 끄덕이면 됐다. 왕의 말은 곧 하늘의 법이 되어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수직적 명령하달체제로 왕권이 강화된 정치를 의미 한단다. 태종 이방원은 권력형 비리를 뿌리 뽑고자 본보기로 왕비 원경왕후의 외척 동생인 처남 민무구 민무질 등 4형제+사돈까지 죽여 법을 지키지 않으면 누구라도 처벌받는다는 원칙을 세워 놓았다. 외척이나 공신의 권력남용을 철저히 다스린 그는 법치국가를 이룩한 냉혹한 군주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킬러였다. 그렇게 조선건국의 기틀을 막강하게 올려놓았다. 오늘날의 주민등록증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태종 이방원이었다. 호패법 실시가 그것이다. 16세 이상의 남자들에게는 허리에 이 호패를 차고 다니라고 명하였다. 신분에 따라 품격이 다른 이 호패에는 이름, 출생년도, 계급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인구 동태를 파악하고 치안과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기 위해서 실시하였던 것이다. 숭유억불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북을 두들겨 억울함을 상소하는 국민 신고제다. 프랑스 영화 킬러 ‘레옹’은 마지막에 죽는다. 레옹을 따라다녔던 어린 소녀 마틸다는 레옹의 해바라기 꽃 화분을 가슴에 안고 간다. 그 해바라기는 소녀의 희망이었으며 소중한 생명이자 지켜야 할 꿈이었다. 비록 태종 이방원은 피로 권좌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제대로 된 올바른 나라를 아들 세종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태종의 강력한 카리스마적 왕권강화는 훗날 세종을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열 수 있게 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킬러 레옹을 닮은 태종 이방원, 그는 프랑스 루이 14세 왕 절대 군주 태양왕이었다. “짐이 곧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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