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며칠 간 학생 9명을 데리고 미국 문화 탐방을 다녀왔다. 미국 생활을 좀 더 깊게 알고자 어느 가정에 홈스테이를 정하였다. 그 집은 남편이 미국인이고 사모님은 한국 사람으로 한국에서 온 구순을 넘긴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도착한 날 방 배정을 하다 내가 노모와 함께 방을 쓰게 되었는데 치매를 앓고 있으니 잘 돌봐 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첫날, 시차 때문에 잠을 설칠 것이라는 예상은 하였으나 저녁을 먹고 누우니 비행기에서 시달린 탓인지 잠이 빨리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서인 듯 말을 들었다. ‘가자 가자 아요 가자 가자’ 하는 말이 계속 들려 눈을 떴다. 시계는 12시를 넘고 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이다. 남한으로 피난 온 노모가 북의 고향이 그리워 아들에게 하던 그 소리다. 나는 미국에서의 첫 밤을 오발탄과 맞닥뜨렸다. 노모의 고향은 거제도로 옆 동네로 시집을 가 예순이 다 되어갈 무렵 시집 간 딸을 따라 미국으로 오셨단다. 이 노모가 오발탄을 읽었을 리 없지만 내면의 그 소리는 고향을 그리는 원초적 언어다. 그렇게 깬 잠은 오지않고 할머니의 손만 꼭 잡고 있었다. 첫날의 할머니의 마음 속을 단언하게 된 것은 둘째 날에도 벌어졌기 때문이다. 거의 그 시간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금도끼로 찍어내고 은도끼로 다듬어서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 년 만 년 살고지고 천 년 만 년 살고지고’ 분명 할머니는 곤히 주무시는 데 순서 하나 바꾸지 않고 계속 이렇게 이어진다. 낮에는 내내 온전치 못한 말씀을 하시는데 이 밤에 어이 이리 가슴 에이는 노래를 부르는 지... 전혀 잠이 오지 않는다. 나도 따라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 ‘수구초심’ 광속으로 변하는 세월을 사는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이 단어가 유효할 것인지. 가장 잘 산다(?)는 미국. 온전한 정신을 갖지 못한 우리의 엄마가 깊은 밤 잠 속에서 찾는 것은 내가 단순히 생각하는 그 고향만은 아닐 것이다. 삼일째도 그 다음 날도 머물렀던 열 하루 꼬박 나도 잊었던 그 노래를 내내 들으면서 마음에 꽂혀 있던 알 수 없는 편린들이 하나하나 살아났다. 마지막 밤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고 나는 불을 켜고 거제 앞 바다를 노닐며 행복한 기억 속을 거니는 할머니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다. 내일 내가 떠나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가서 거제의 그 바다를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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