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에게는 ‘밝음’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서 보름달이 뜨면 너나 할 것 없이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마음의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다. 팔월 한가위 보름달이 뜨면 강강술래를 노래 부르며 둥글게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춘다거나 정월 대보름이 되면 달집을 태우면서 하늘의 밝음을 이 땅에서도 닮아보려는 마음으로 불을 밝히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액운을 태워서 한해를 편히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깔려있기도 하겠지만, 이 또한 ‘밝음’에 대한 동경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달에게라도 복을 빌어보겠다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무엇에든지 기대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나름대로 자기만의 신(神)을 만들어서 섬기는 무속 신앙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죽하면 그렇게 할까 싶을 정도로 복(福)을 받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이 종교행위이든지 전해져 내려오는 민속놀이이든지 가릴 것도 없이 우리 민족에게는 오래된 풍습으로 남아있다. 그런 모습은 그나마 우리 고장과 같은 농촌 마을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계속해서 전통 마을이 붕괴되고 새로운 도시가 형성됨에 따라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풍습들이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금년 대보름에도 시끌벅적하게 매구를 치는 소리가 동네마다 울려 퍼지고, 여기 저기 논바닥에서 벌어질 달집태우기 행사로 다소 들뜬 분위기가 연출될 것으로 보인다.
고향이 경기도 김포인 필자는 지리산에 내려와서 첫 목회를 시작했던 2003년 그해 정월 대보름날, 동네 어귀에 우뚝 서 있는 정자나무에 칭칭 얽어놓은 금줄이 눈에 거슬려서 인적이 드문 밤중에 그 새끼줄을 다 끊어버린 적이 있었다. 동네에선 난리가 났었는데, 주민들은 필자를 유력한 범인으로 심증을 굳히고 있었지만, 필자는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는 그 다음해부터는 정자나무에 금줄을 거는 일이 없어져 버렸다. 금줄을 설치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동네 분들에게 심히 죄송하고 송구스럽다. ‘그냥 놔두었어도 세월이 지나가면 귀찮아서라도 안 하게 될 것을 괜히 성급하게 행동했구나!’라는 후회도 해 보았다. 아직까지 공소시효가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용서를 구하면서 그 이후 지금까지 그 분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섬기며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에게 참 복을 주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이다. 그 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시다. 물론 우리 인간도 그 분의 손에 의해서 지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복을 구해야 할 대상은 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도 아니고, 동네 어귀에 서 있는 정자나무도 아니다. 처음 지리산 목회를 시작했을 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어서 너무 화가 났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분들의 마음을 이해해 드리면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해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종교와 상관없이 제사도 귀찮아서 안 지내는 세상에 달을 보면서 복을 비는 분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그런 일을 하시게 될까하는 연민마저도 든다. 종교와 문화가 갈등하고 반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종교는 종교이고 문화는 문화일 뿐이다. 다만 종교는 불변하지만, 문화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고 달라진다. 종교가 문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해서 나타나는 결과들은 언제나 비극적인 갈등뿐이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필자의 아내는 가끔 내 속옷을 즐겨 입었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아내에게 면박을 주며 구박을 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처녀 때의 수줍음과 남편에 대한 경외감이 어느 날부터인가 사라져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방구를 뀌거나 나 혼자 일을 보고 있는 화장실로 느닷없이 뛰어 들어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일을 보는 아내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내 속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본 뒤로는 엄청난 충격과 배신감이 밀려왔다. 누렇게 변색된 채로 너덜너덜하게 다 낡아빠진 속옷을 버리지 않고 계속 입고 다닐 때부터 벌써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사실은 한 번도 아내에게 속옷을 사 주지 못한 내가 잘못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예쁘고 순진하고 착했던 아내가 3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오는 동안 서서히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얻은 결론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언젠가는 변하고 달라지고 사라지고 다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 문화이다. 그런 면에서 달집태우기 행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그것에 편승하는 미신적인 요소는 잘 분별해서 제거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는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종교인들의 자발적인 헌신과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따라서 종교의 파급효과는 기대 이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필자도 그동안 바가지로 일관했던 삶의 방식을 고쳐서 예쁜 속옷을 자주 사다 줌으로써 예전의 아내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아내는 내가 사랑해 줘야 변화되듯이 우리 문화도 우리가 사랑해 주어야 아름다운 문화로 변화될 수 있게 된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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