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언론 매체는 찌푸린 하늘같습니다. 우리 모두를 우울하고 슬프게 하여, 삶의 에너지를 헛되이 고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해 ‘갑질’ 논란이, 요즘에는 ‘금수저, 흙수저’의 태생적인 계급으로 비화(卑化)되는가 하면, 우리 사회 전반의 불신과 미움의 풍조는 ‘혐오공화국’이란 말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나와 동조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적대적 증오[악플]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온라인상으로 내뱉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나라는 전쟁의 폐허의 가난에서 벗어나 단기간에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을 이루어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경제성장 위주의 정책과 IMF 등의 경제 위기를 당하면서 사회적으로 약자에 대한 배려가 소홀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대기업과 상위층에게 부(富)의 편중이 더욱 심화되어,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의 계층 고착화는 계층 간의 소통 단절과 이동의 통로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래서 흙수저로 태어난 사람이 금수저를 갖기에는 쉽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 서민층의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헬조선(지옥을 뜻하는 ‘hell’과 ‘조선’의 합성어로 대한민국이 살기 힘들고 희망이 없음을 풍자하는 말)’이란 자조적인 말이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도 2만 6000불에 이르고 있지만, 정작 빈부의 양극화가 우리 모두를 불행으로 내몰게 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가지게 됩니다. 사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한 노력으로 물질적인 부를 이루는, ‘자수성가(自手成家)’는 서민층이 꿈꾸는 모델입니다. 그럼에도 누구나 ‘금수저’를 가진 부모에게서 태어나기를 희망합니다. 금수저의 부모를 만나면 그만큼 상류층에 쉽게 진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금수저를 쉽게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새삼스럽게 ‘경제 민주화’란 말이 그리운 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공정한 사회에서 자신이 흘린 땀의 대가만큼 금수저는 아니더라도, 은수저 정도의 부는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부의 분배에 있어서 공평할 때 우리 젊은이들이 건전한 삶의 가치를 가지고 꿈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물질은 풍요로운 삶에 필요한 것이지만, 행복의 절대지수는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금수저이든 흙수저로써 삶을 영위하지만, 삶의 가치와 행복은 마음의 풍요로움에 있습니다. 금수저로 풍요롭게 누린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요, 흙수저를 가져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금수저와 흙수저 자체로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진 사람은 가진 부의 무게만큼 근심이 많고,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이나 열등감으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가진 사람이 ‘갑질’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금수저를 물질만능주의의 도구로 오용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평등과 존엄성을 저버리는 몰지각한 ‘갑질’은 자신의 행복마저 위협하는 돌팔매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평범한 삶의 진리를 망각한데서 기인합니다. 물질은 삶의 가치를 이루는 수단입니다. “돈은 돈다.”는 말처럼, 본질적으로 수저[물질]는 소통과 나눔의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금수저는 자신만의 잇속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나눔과 배려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나 상류층이 도덕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란 말이 있듯이, 금수저가 사회복지의 참된 도구역할을 다할 때, 우리 사회는 소통과 공감을 이루는, 신뢰하고 평화로운 삶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미국의 빌 게이츠는 40조원 이상을 사회에 환원[기부]하여 수천만의 병자와 젊은이들에게 꿈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사회적 기업가나 금수저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나눔과 배려로 서로를 신뢰하고 감사하면서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감정은 전염된다고 했습니다. 비난과 미움의 사회적 풍조는 아이들에게 절망감을 전염시킵니다. 아이들이 우리 사회를 부정적으로 불신하기보다는 긍정적인 삶의 자세로 꿈을 품고, 정당한 부의 획득과 나눔을 통해 행복한 삶의 가치를 함께 이루도록 긍정 에너지를 불어넣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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