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사랑과 희망을 담은 노래이다. 그중에서도 이스라엘의 국가인 하티크바를 참 좋아하고 즐겨 듣는다. 히브리어인 하티크바는 우리나라 말로 “희망”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국가인 하티크바의 가사는 이렇다. “오랜 세월 속에 유대인의 영혼을 갈망하리. 그리고 동방의 끝에서 모두의 시선이 시온을 향하리. 2천년 동안의 희망이 있기에 우리의 희망은 잃지 않으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나아가리 시온과 예루살렘의 땅으로 가리”
이스라엘은 서기 77년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결국 멸망하였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위로 올라가실 때 자신을 위해 우는 여인들을 향하여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라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였고 주님도 우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한탄하셨다.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의 심장인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유대인들은 약속의 땅 예루살렘을 떠나 제 3번째의 포로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 1의 포로생활은 기원전 2000년경에 애굽에서 시작되었고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다. 제 2의 포로생활은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당한 때 일어났다. 그들은 바벨론 강가에서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로 옷을 빨았다라고 기록하였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조국을 멸망시킨 나라에서 살아가는 그 비애를 어찌 다 이루 헤아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은 그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였다. 모두가 포로라고 해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였다. 다니엘, 느헤미야 등 고위층에서도 유대인들은 큰 활약을 하였다. 그들은 약속의 땅 정든 고향의 땅을 밟을 것을 항상 떠올리며 희망의 끈을 잡고 있을 무렵 결국 희망이 현실이 된 일이 나타났다. 그 일을 위해 예비된 사람이 바로 고레스 왕이였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페르시아 왕으로 세운 경륜을 깨닫고 그 뜻대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다. 포로 생활을 한지 정확히 70년이 된 해에 자유의 몸으로 고향 땅으로 돌아 온 것이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흥분된 일인가? 유대인들이 70년 동안의 포로생활에서도 삶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언약에 의한 “희망”이였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에서 그 선지자는 포로기간은 정확히 70년이라는 한정된 기간이라고 밝히면서 그 후에 하나님은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희망을 선포하였다.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의 징계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포로가 되어 비참하게 끌려가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회복시키신다는 메시지가 유대인들에게는 희망을 갖게 하였다.
현실은 비참하고 어둡고 암담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떠올리며희망을 그렸다. 이제 유대인들의 제 3의 포로 생활은 독립과 함께 끝이 나고 다시 희망을 노래하며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다.
2천년동안 나라가 없이 지낸 민족이 다시 독립된 언어와 문화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역사학자인 토인비가 말했듯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지만 놀랍게도 역사적 진리를 거슬리고 1948년 5월 16일 이스라엘은 독립국가를 만들었고 전세계에 이를 당당히 알렸다. 이스라엘을 보면 희망이 만드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도 5백만명이라는 기록적인 대학살을 경험하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애국가의 제목이 “희망”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지금 우리 사회는 헬조선과 흑수저라는 신조어가 유행 되고 있다. 모두 희망을 태우고 절망과 분노와 갈등을 조장하는 말이 독버섯처럼 자라가고 있다. 희망 없는 나라와 가정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이젠 바뀌어야 한다.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는 가정, 그리고 학교 그리고 이 나라가 되기를 바라며 이제 통일을 준비하는 다음 세대에게 우리는 물질의 번영과 성공과 명예보다 “희망”이 있는 나라를 물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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