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엄천골의 올 겨울은 유난히 춥네요. 예년 같으면 정월에 들어서야 엄천강이 살짝 얼어붙곤 했는데 이번에는 동짓달부터 엄천강이 짱짱 소리를 내며 얼어붙더니 겨울 내내 두터운 빙판을 이루어 얼음장 밑으로 과연 강물이 흐르고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답니다. 그리고 그 두터운 빙판은 흰 눈옷을 입었다가 벗어버리기를 반복하네요. 하지만 매서운 엄천골 겨울도 이제는 한걸음 물러섰습니다. 아침이면 아직도 하얗게 서리가 내리지만 겨울의 끝 무렵이면 으레 내리는 그런 서리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엄천골 겨울이 추워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여기서 많이들 만드는 곶감은 추울수록 당도가 높아지거든요. 옛날부터 이곳 곶감은 유달리 맛이 있어 임금님께 진상하였답니다.전래동화 ‘호랑이와 곶감’도 엄천골에서 유래되었지요. 지리산 상봉에서 내려오는 골짝바람에 감이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하면서 곶감은 호랑이도 겁나게 맛이 든답니다. 오늘은 덕장을 정리하다가 색깔과 모양이 맘에 들지 않아 한쪽에 밀쳐놓은 곶감을 하나 베어 물고는 약간 놀랐습니다. 그간 팔아오던 때깔 좋은 곶감보다 맛이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먹거리란 입맛이 다 다른 법이니 혹 내입에만 맛있나 싶어 아이들에게 몇 개 집어주니 맛있다며 또 가져갑니다. 색깔이 거무튀튀하다고 찡그리더니 맛은 있는지 자꾸 먹습니다. 나는 말라비틀어지고 하얗게 분이 나있는 이 못난이 곶감을 헐값에라도 팔아볼 요량으로 뒤늦게 손질하다 우리 마을 등구 할머니를 떠올렸습니다. 등구 할머니는 등구 마을에서 시집을 오셨습니다. 등구 마을은 엄천골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칠선계곡에서 오도재로 올라가는 고개 아랫마을 입니다. 오도재는 지리산 주능이 보이는 곳인데 천왕봉부터 노고단, 바래봉까지 한 눈에 시원하게 보입니다. 등구 할머니는 이제 칠순보다 팔순에 가까운 나이지만 아직도 대여섯 마지기의 논농사에 적지 않은 밭농사와 함께 소도 한 마리 먹이고 있습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이제 농사일에 손을 놓고 손주들 재롱이나 보며 여생을 지내실 만도 한데 아직도 사십대인 나보다 일을 많이 하십니다. 지게에 소똥 거름을 지고 우리 집 위로 비탈진 밭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오르내립니다. “할머니! 아직 눈도 녹지 않았는데... 길도 미끄러운데 넘어지면 어쩌시려고... 눈이나 녹고 날이 좀 풀리면 하세요~” “아이고 괜찮아... 놀면 뭐해... 일이나 하지...” 입을 앙다문채 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올라가는 할머니의 모습은 굳은 의지를 그림으로 그린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할머니 집에 마을 물세를 받으러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더니 할머니는 이 추운 동짓달에 마당에서 웃통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감고 있었습니다. 머리를 감느라 내가 온 것을 모르는 것 같아서 나는 민망한 걸음을 우물쭈물 돌리려는데 할머니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고는 하회탈에 나오는 이매같은 웃음을 터트립니다. 못난이 곶감을 가릴 생각도 않고...** 10년 전 이맘 때 일기입니다. 그 해 겨울은 지금처럼 따뜻하지 않고 추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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