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 늦가을 다른 농가에서는 한창 감을 깎아 매달고 있는데 나는 일손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습니다. 지난 해 우리 집에서 감을 깎던 아주머니들은 모두 양파 심으러 가버렸습니다.(들에서 양파 심는 품삯이 집에서 곶감 깎는 것보다 한 장 더 많습니다.) 이곳 지리산 엄천골짝은 양파가 또 유명합니다. 엄천골은 게르마늄이 많은 지역이라 양파가 단단하고 저장이 오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곶감 깎는 시기가 양파 심을 때와 겹쳐 때만 되면 양파농가와 곶감농가의 일손확보 전쟁이 벌어집니다. 양파농가에서는 양파도 아직 다 안 심었는데 감을 깎는다고 곶감농가에 한소리하고, 곶감농가에서는 설이 오기 전에 곶감을 만들려면 더 이상 늦출 수가 없다고 항변하지만 싸움은 항상 한 장 더 주는 양파농가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래서 깎으려고 마당에 재어 놓았던 감을 다시 저온창고에 넣고 일손 구하러 여기저기 소리하고 다니는데 먼저 곶감을 매단 농가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이걸 우짜믄 좋노~~” “와요? 와 그라는데...” “감이 바닥에 다 붙어 버렸어~~”“감이 와 바닥에 붙어요?” “몰라~~소똥 붙듯이 바닥에 다 붙어 버렸다니까...”무슨 소린가 싶어 감이 붙어버렸다는 집에 가보니 정말 덕장에 매달려 있어야 할 감이 소똥처럼 바닥에 흥건했습니다. 바닥에 붙어 버린 겁니다. 100년만의 이상 고온으로 감이 마르지 않고 홍시가 되어 바닥에 모두 떨어져버린 겁니다. 이어 방송에서는 연일 상주, 산청 등 유명 곶감산지 의 피해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오래 전부터 곶감을 많이 깎았던 이곳 어르신들이 그러셨답니다. ‘중은 올깎이고 감은 늦깎이야.’ 중이 되려면 일찍 머리를 깎는 게 좋고 곶감을 만들려면 늦게 감을 깎는 게 좋다는 말인데, 중이 안 돼 보아서 왜 일찍 머리를 깎아야 하는지는 몰라도 감을 깎아보니 늦게 깎아야 한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나는 알고 늦깎이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일손이 없어 재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상고온은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점도 있었는데 감이 숙성이 잘되어 100년 만에 가장 달콤한 곶감이 된 겁니다. 그래서 감을 모두 붙여버린 사람이든 운좋게 비켜간 사람이든 모두들 한마디씩 합니다. “달기는 엄청 달아~~” 요즘 엄천골에는 곶감 도매상인들이 자주 들락거립니다. 양파 때문에 감을 늦게 깎은 농가가 많은 엄천골은 지난해보다 곶감 작황이 좋다는 소문이 상인들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으로 이전에는 상인들이 우리 같은 영세 농가까지 다니며 곶감을 사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집에도 상인이 왔었지요. 경기도에서 과일도매를 엄청 크게 한다고 하더군요. 내가 만든 곶감을 도매로 팔아본 적이 없고 팔겠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지만 막상 상인이 찾아오니 기대가 되었습니다. 올해 유난히 때깔 좋고 숙성이 잘 된 곶감을 보고 상인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지으며 ‘이미 포장된 곶감과 아직 덕장에 말리고 있는 곶감까지 모두 좋은 가격에 사겠다.’라고 말하길 기대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상인의 얼굴에서는 만면의 미소는커녕 입냄새 나는 썩은 미소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재밌는 얘기가 많지만 말을 하자면 길어질 것 같아 결론만 말하겠습니다.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려고하는 상품이 좋아도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도록 엄격하게 표정관리를 하는 상인에게 좋은 가격에 손쉽게 곶감을 팔고 싶은 곶감쟁이는 크고 달콤한 곶감을 맛보여주며 몇 번 방아쇠를 당겨 보았지만 표정관리의 달인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고, 햇볕을 많이 받아 색이 바랜 곶감을 골라 질겅질겅 씹어 먹으며 가격을 후려치던 달인을 나는 안다리 후리치기 한판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3년 전 이맘 때 쓴 일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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