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는 길목에 떨어진 낙엽이 수북하다. 덩그러니 한 장 남은 달력도 올 한해를 떠나려고 채비를 하고 있다. 가을과 함께 먼 길 떠난 친구를 생각하며 받을 이도 없는 편지를 쓴다.친구야 우리가 처음 만난 때가 핏기 꾀나 있었던 40대 초반이었으니 20년 넘은 세월이 훌쩍 흘러가 버렸구나. 자네의 첫인상은 여느 농부들처럼 건장해 보이지도 않았고 친구들보다 부쩍 나이 들어 보여 형님처럼 느껴졌었지. 그런 약한 몸으로 거칠고 힘든 농사일에다 소까지 키워내는 재주가 놀랍기까지 했다네. 몇 년 전 부부동반으로 욕지도에 갔을 때 혼자서 섬 한 바퀴를 걸어서 돌 요량으로 나서는데 다른 친구 한명과 같이 가겠다고 해서 자네 건강이 좋지 않을 때라 말렸지만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 셋이서 섬 길을 동행한 적이 있었지. 그때 지팡이 짚고 다리를 절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네 모습을 보고 힘들고 어려운 농사일을 해낼 수 있었던 저력이 강한 의지에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네. 걸으면서 들려준 이야기로는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아버지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초등학교 때는 우등상을 받을 만큼 공부를 잘했으나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었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는 것과 가난이 한이 되어 좋은 들논을 몇 마지기 가지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는데 열심히 노력해서 장만한 논을 친척 보증으로 경매로 잃었으나 간신히 되찾아 끝내 지켜냈다고 이야기 하던 모습이 눈이 선하네. 요즈음은 모두 소를 사료와 건초로 키우는데 꼭 소죽을 끓여 주는 것을 보고 정성스런 주인을 만난 소들이 행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해마다 수확철이 되면 애써지은 감자며 양파 등을 작은 오토바이에 싣고 가져다주면서도 쑥스러워 하던 순수한 모습에 항상 감동을 받았다네.이제 친구가 떠났으니 정성과 우정이 담긴 농산물을 어디에서 먹어보겠는가. 참 고마웠다네. 자네는 언제나 나눠주기를 좋아했던 천생 촌부였지. 친구들과 여행을 가면 친구들을 위해 언제나 지갑을 먼저 여는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었지. 며칠째 가을비가 계속 내리고 있는데 장지에서는 날씨가 참 맑았다네. 선한 사람을 맞이하는 하늘마음이라 생각되었네. 장지에서 딸아이가 “아버지 고마웠어요”하고 우는 모습을 보고 이런 작별인사를 받고 떠나는 자네가 참 행복한 아빠라고 생각했네.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온화한 모습으로 대했고 가정도 화목하게 꾸리고 자식 농사도 잘 지어 삼남매를 반듯하고 당당하게 키워 손자까지 보았고 어렵고 힘든 농사일로 살림도 웬만큼 일구었으니 성공한 농부가 아닌가. 큰 욕심 내지 않고 소박한 꿈을 이룬 자네의 삶이야말로 참으로 값진 삶이었다고 생각되네. 변변찮은 내 글을 읽고 글 쓴 사람이 내 친구라고 자랑해 주던 우정에 감사하고 자네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참 행복했다네. 한평생 농부로서 꿋꿋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멋진 삶의 모습과 베풀어준 우정을 가슴깊이 간직하겠네. 이제 지면에서도 헤어질 시간이 된 것 같네. 잘 가라는 인사대신 다시 만나자고 말하겠네. 내가 좀 부족하고 싱겁긴 해도 다시 만나면 친구로 맞아주게. 그리고 자네에게 전해 줄 말은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야”하고 말하는 듯 웃고 있는 영정사진이 멋있었다네. 부연(敷衍): 유림 옥동에서 농부로 평생 순박하고 성실하게 살다간 친구 박찬조를 추억하며 농업인으로 이 고장을 지켜온 모든 분들의 수고에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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