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중에 최고의 명연설로 손꼽히는 ‘I Have a Dream!’(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이라는 연설이 있다. 이 연설은 에이브라함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이나 존 F. 케네디의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와 함께 미국의 역사를 바꾼 명연설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언변이라든가 설득력도 대단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꿈을 이루기 위한 그의 행동이 뒷받침된 연설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명연설이 된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꿈이 없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것이 꿈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학생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원하는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 될 것이다. 필자가 잘 알고 지내는 어떤 권사님은 어렸을 때 꿈이 뭐냐고 묻는 담임선생님께 다방 아가씨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가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았다고 말해서 한참 웃었다. 여고시절 그 권사님이 속한 문학반에서 다방을 빌려서 시화전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따뜻한 다방에서 하루 종일 노닥거리기만 하면 되는 다방 아가씨, 특별히 그땐 못 먹고 못 살 때였기 때문에 철이 없었던 그 권사님은 멋지게 차려입고 다니는 다방 아가씨가 그렇게나 부러웠단다. 그래서 그 권사님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다방아가씨가 되는 게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다는 거였다. 유년기에 필자가 가졌던 꿈은 버스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마이카 시대는커녕 하루에 한두 대 들어오는 시골 버스에는 온갖 사연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다니는 버스 기사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시골마을에 버스가 들어오면 길을 가던 우리들은 열심히 손을 흔들어주었고, 버스 기사 아저씨는 신이 나서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 길을 내달렸다. 그런 꿈 때문이었는지 결국 필자는 지난달에 25인승 미니버스를 한 대 장만하게 되었다. 작은 시골교회에서 버스가 웬 말이냐고 하겠지만, 사놓고 보니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가끔 동네 아이들을 위해서 등교도 시켜주고 마을 행사가 있을 땐 동네마다 다니면서 어르신들을 모시기도 하고, 필자를 아는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차 운행을 부탁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어린 시절 꿈꿔왔던 버스 기사 흉내를 내 보곤 한다. 우리 독자들은 어떤 꿈을 가지고 사는지 궁금하다. 딱히 지금 가지고 있는 꿈이 없다면 예전에는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예수님의 꿈은 모든 세상이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그의 제자들에게 심어주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목숨을 다 바쳐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렸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된 사도행전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한 사람들의 기행문이다.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오순절 성령 사건을 시작으로 베드로와 바울의 놀라운 선교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사도행전의 내용은 자신들의 꿈과 예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일컬어서 흔히들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베드로라는 사람이나 바울이라는 사람은 정말 미친 사람들이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제 정신을 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무언가에 취해서 살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박이나 중독성 물질이나 이성(異性)에 미쳐서 산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벌써부터 스마트폰이나 게임에 중독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왕 미칠 바에는 우리의 정신과 행동을 온전하게 해주는 것에 미쳐야 하지 않을까? 사도행전에는 미친 사람이 또 하나 등장한다.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는 있으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라는 사람이다. 그는 의사로서 사도바울의 주치의였다. 평소에 몸이 성치 않았던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바울의 모든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우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우리’라는 단어는 누가 선생이 바울 사도와 함께 전도에 동행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이다. 누가 선생은 의사였으면서도 역사가로서 매우 객관성 있는 필치(筆致)로 사도행전을 기록했다. 필자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역시 뛰어난 인물은 역사책만 바꾸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바른 역사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도행전은 주후 61년에서 63년 사이에 사도 바울이 죄인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가서 가택연금 상태가 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이 해피엔딩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누가 선생은 이방인들에게, 특히 데오빌로 각하라는 특정인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오늘날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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