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육십령의 길목에 위치한 황석산성. 지리적 요충지의 황석산성은 7년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민초들이 숨져간 역사의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義)와 충(忠)의 고장 함양에서 민과 관이 합심해서 이룩했던 황석산성 전투는 관련 사학자나 해당 지역민이 아니고서는 잘 알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황석산성 전투는 제대로 기록되어지지 않은 전투로 남아있다. 정사에서는 수백의 관군만이 싸웠다고 전하지만 야사에는 7천의 민관이 7만의 왜구를 맞아 수일 동안 임전했다고 전한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황석산성 전투와 남원전투나 성웅 이순신이 활약한 명량해전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이다. 황석산성에서 숨져간 이들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검증되지 않은 역사의 파편으로만 남아있다. 이번 기획취재를 통해 함양군민만이라도 황석산성 전투와 그 속에서 숨져간 이들을 기렸으면 한다. <편집자 주>1. 정유재란과 황석산성 전투의 시작 2. 민초들의 이뤄낸 황석산성 전투 3. 남원산성 전투와 만인의총4. 7만 민관군 처절했던 진주성전투5. 황석산성 전투 역사의 전면에 서야5. 황석산성 전투 역사의 전면에 서야7년 전쟁 임진왜란은 1592년 4월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시작되어 1598년 11월 19일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을 끝으로 종결된다. 임진왜란은 조선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전답은 황폐해지고 경작지가 1/3로 줄어들었다. 이 보다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공식 기록으로 조선군의 전사자는 7만명, 명나라 3만명, 왜군 14만명의 피해가 발생했으며, 민간인 사상자는 15만명으로 추산되지만 실제로는 수백만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남녀와 도공 등 5만 명이 넘게 일본으로 끌려갔으며, 문화재만도 10여만 점이 약탈당한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조선 전역에 전쟁 당시 공을 세운 장수들과 지역에는 큰 포상이 부여됐으며, 숨진 이들의 넋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민족혼의 성지로 남아야 할 황석산성은 이렇다 할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 일본의 철저한 역사 왜곡은 황석산성 전투를 역사의 전면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황석산성 전투가 끝난 지 418년, 광복 70주년, 사대주의 사관에서 벗어나 이제는 황석산성 전투가 역사의 전면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숨진 이들의 넋을 달래야 할 때이다.황석산성 전투의 고찰황석산성 전투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1597년 8월16일 총포로 무장한 왜군 2만~7만여 명이 황석산성 공격을 시작한다. 이에 맞서 수성장 곽준 안의현감과 조종도 전임 함양군수를 비롯해 함양과 안의, 거창, 합천 등 7개 고을에서 집결한 백성 7000여명이 힘을 합쳐 5일간 맞선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잘 훈련된 왜군에 맞선 일반 백성들은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산화했다. 성내에서 숨진 이들은 500여, 성 바깥에서 숨진 백성들이 수천이라고 전한다. 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5일 동안 그들과 맞서 싸우며 심대한 타격을 입힌 이들이 일반 백성들이었다는 사실에 분노를 표하며 모든 이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황석산성 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기세가 꺾이면서 정유재란이 빠른 시일에 종결될 수 있었다.숭고한 희생, 그러나 조정의 냉대이처럼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백성들의 전투-일부에서는 민병전이라고 함-는 역사적 의미까지 더해지면서 큰 부각을 받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당시의 친명 사대주의, 당쟁, 일본의 의도적 은폐 등 다양한 정세로 인해 부각되지 못했다. 황석산성 전투는 조선 조정에서 파견된 지명도 높은 장수가 참여했던 것도 아니었으며 한명의 명나라 군인도 참여하지 않았다. 오로지 지방의 관군과 백성들에 의해 치룬 전투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계급사회와 신분제 사회에서 지명도가 떨어지는 장수와 함께 일반 백성들이 참여한 전투는 본질이 훼손되고 외면과 홀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중에도 치열하게 당쟁을 벌이던 시기로 정파적 이해관계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외면 받을 수밖에 없었던 전투였다. 500여명이 성을 지키려다 숨졌다고 적은 역사서만 보아도 황석산성 전투가 기득권 세력들에게는 얼마나 숨기고 싶은 전투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울러 일본의 입장에서도 정규군이 아닌 관민과 맞서 싸우면서도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을 크게 부각시킬 수 없었으며 이는 곳 일제 강점기 전쟁기록 자체의 삭제로 이어졌다. 황석산성 전투 역사바로세우기최근 황석산성 전투를 재조명 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해 12월 함양군과 국가원로회의는 민족혼이 살아 있는 황석산성 전투에 대한 역사적 복원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 주 내용으로 사적지 완전 복원과 국가 차원의 제향, 그리고 나아가 황석산성 전투의 역사교과서 등재 등을 목표로 했다. 현재 민간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제향과 추모행사 등이 국가 차원에서 제향이 이뤄지고 있는 남원의 만인의총이나 금산 칠백의총 수준의 예우를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다. 특히 가장 큰 의미로는 황석산성 전투의 의의와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자는데 있다. 황석산을 성역화 함으로써 역사적 교훈을 후세에 전승하고 민족의 정기를 더 높이기 위한 사업이다. 가장 시급한 것이 역사적 고증이다. 당시의 기득권에 의해 제대로 역사서에 기록조차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남아 있던 전투의 기록마저 일제 강점기 모두 파기되면서 제대로 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우선 민간에서 내려오는 사료를 찾고 일본에 남아있는 황석산성 전투 기록을 찾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체계화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토론회와 공청회, 세미나 등을 열어 군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여론을 주도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어느 정도의 여론이 형성되면 국가 차원의 제향 등도 이뤄질 수 있으며 교과서 등재 또한 가능해 질 것이다. <인터뷰> (사)국사문화원 하도훈 원장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영웅적인 사건, 재조명 되어야”“황석산성 전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영웅적인 사건임에도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황석산성 전투에 대해 담담하게 말하는 (사)국사문화원 하도훈 원장. 500여년 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황석산성 아래 안의면 황대마을에서 국사문화원을 운영하며 황석산성 전투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지난해 황석산성 성역화 사업을 위해 함양군과 국가원로회의의 가교 역할을 하는 등 황석산성 전투의 실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이가 하도훈 원장이다. 그는 “황석산성 전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영웅적인 사건임에도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라며 “친명 사대주의 사관에 문든 조선정부의 역사인식의 오류와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은폐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는 황석산성 전투가 정규군의 전투가 아닌 관군과 백성이 일본군에 맞서 싸운 ‘민병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황석산성 전투는 군대가 싸운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싸운 민병의 전투였습니다. 그래서 잊힐 수밖에 없었던 아픈 전투입니다.”라고 설명했다. 하 원장은 또 “조선과 일본 모두 부끄러운 전쟁이었다. 양민이 모두 죽도로 내버려 둔 조선, 일본의 입장에서는 장군이 큰 부상을 입었으며 비정규전으로 민간인 학살하며 일본의 잔인성과 야만성이 그대로 나타났다. 조선과 일본 모두 쉬쉬하며 숨길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하도훈 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이 황석산성 방향으로 진격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그래서 정규군이나 의병, 명나라 군대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남원성이나 진주성 전투는 정규전이었지만 황석산성전투는 비정규전 민병전이었다. 하 원장은 “조명연합군이 전혀 참여하지 않은 전투로 민병들이 싸운 전투에 대해 당시 기득권 세력에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시 백성들은 단순 화살받이로 내몰리는 상황이었다.”라고 말했다. 하 원장은 성역화 사업에 대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할 부분이 황석산성 전투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다. 고고학적 발굴 탐사를 통해 기록물과 구전자료를 대거 모아 나가야 한다. 향토사학 입장에서 정확한 내용 평가를 통해 바로 된 역사를 확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다음으로 황석산성 전투 박물관과 당시의 충효를 되새기며 이를 이어나갈 수 있는 충효교육관 등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학술대회와 세미나 등을 꾸준하게 열어 황석산성 전투에 대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 교과서에 등재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연재 끝><강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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