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육십령의 길목에 위치한 황석산성. 지리적 요충지의 황석산성은 7년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민초들이 숨져간 역사의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義)와 충(忠)의 고장 함양에서 민과 관이 합심해서 이룩했던 황석산성 전투는 관련 사학자나 해당 지역민이 아니고서는 잘 알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황석산성 전투는 제대로 기록되어지지 않은 전투로 남아있다. 정사에서는 수백의 관군만이 싸웠다고 전하지만 야사에는 7천의 민관이 7만의 왜구를 맞아 수일 동안 임전했다고 전한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황석산성 전투와 남원전투나 성웅 이순신이 활약한 명량해전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이다. 황석산성에서 숨져간 이들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검증되지 않은 역사의 파편으로만 남아있다. 이번 기획취재를 통해 함양군민만이라도 황석산성 전투와 그 속에서 숨져간 이들을 기렸으면 한다. <편집자 주>1. 정유재란과 황석산성 전투의 시작 2. 민초들의 이뤄낸 황석산성 전투 3. 남원산성 전투와 만인의총4. 7만 민관군 처절했던 진주성전투5. 황석산성 전투 역사의 전면에 서야3.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전북 남원하면 떠오르는 것 2가지는 성춘향과 추어탕일 것이다. 이도령과 성춘향이 사랑을 나눴던 광한루는 전 국민이 모두 알고 있는 핫 플레이스이며, 프랜차이즈 음식 남원 추어탕 역시 국민 음식으로 통한다. 그러나 역사의 현장 정유재란 당시 1만 민관군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순절한 만인의총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남원성 전투는 황석산성 전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전라도 지역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전주를 공략하기 위한 길목인 함양과 남원. 그래서인지 함양과 남원에서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황석산성 전투와 남원성 전투가 발발했다. 함양에서는 수천의 민관이, 남원에서는 수만의 민관군이 일본군을 막기 위해 분전하다 스러져갔다. 전투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전원 숨졌지만 후대의 평가는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인다. 잘 정비된 남원의 만인의총을 둘러보고 황석산성 전투를 되새기려 한다. 남원성 전투의 개요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수년이 흐르면서 지지부진한 협상을 벌이던 일본군은 돌파구 마련을 위해 다시 한 번 대규모 병력을 일으킨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눠 우군은 서생포로 상륙해 밀양과 합천, 거창, 황석산성을 거쳐 전주로 입성하고, 좌군은 사천에 상륙해 하동과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에서 좌우군이 만난다는 계획이었다. 우군과 좌군에게 걸림돌로 나타난 것이 함양의 황석산성과 남원의 남원성이다. 지금으로부터 413년 전 무더위가 절정을 이루던 8월 어느 날. 함양 안의의 황석산성에서는 14일부터 18일까지, 인근의 남원에서는 13일부터 16일까지 처절한 전쟁이 벌어졌다. 군인은 물론 관군과 민간인까지 모든 이들이 총 동원되어 벌어졌던 전투, 황석산성 전투와 남원성 전투다. 전라도 점령을 명령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뜻에 따라 일본 육군과 수군을 합한 대규모 병력이 남원에 도달한 것이 8월13일. 남원성을 포위한 왜군은 무려 5만6000명. 남원성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로 조선 조정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이곳에는 전라병사 이복남, 구례현감 이원춘, 조방장 김경로 등 조선의 군사 1000명과 명나라 군대 3000명을 합해 겨우 4000명이 지키고 있었다. 5만과 4만의 대결이었다. 그나마 성안에 있던 백성들까지 합하면 대략 1만여 명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전투 전 일본군은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자존심이 높은 양원은 이를 한 마디로 물리쳤으며 이렇게 전투는 시작됐다. 전투의 결과는 참혹했다. 왜군은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워 사흘간의 전투 끝에 남원성을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은 100여기를 이끌고 성을 탈출했고 나머지 남아서 싸우던 조선군과 명군 그리고 백성들은 몰살당했다. 왜병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찾아내 죽이고 전리품으로 코를 베는 만행을 저질렀다. 피난 갔던 백성들은 전투가 끝난 뒤 성으로 돌아와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우선 시신조차 온전치 못한 희생자들의 뼈를 모아 북문 밖에 묻었다. 이 무덤이 바로 오늘날 남원시에 남아있는 만인의총이다. 처음에는 성 북문 쪽에 위치했지만 후일 남원역 쪽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1964년 지금 자리로 온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의의를 인정한 정부는 지난 1981년 4월 이곳을 사적 272호로 지정했다. 현재는 양력 9월26일-남원성 전투가 끝난 8월16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전북도지사를 헌관으로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순의재향을 올려 넋을 달래고 있다.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 전라북도 남원시 만인로 3번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의 넋을 달래는 만인의총이 자리한 곳이다. 8만6000㎡ 부지에 들어선 만인의총은 한해 15만 명 이상의 참배객들이 다녀간다. 만인의총은 전쟁이 끝난 후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이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면서 만들어졌다. 이후 1612년(광해 4년) 사당을 건립하고 전라병마사 이복남 등 7충신을 모셨으며, 1653년(효종4년)에는 충렬의사액이 내려졌고, 1675년(숙종원년)에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이건한 뒤 1897년(고종8년) 사우가 철폐되어 단을 설치하고 춘추로 향사해 왔다. 이곳도 함양의 황암사와 비슷하게 일제강점기 수난도 겪었다. 일제가 단소를 파괴, 재산을 압수하고 제사마저 금지했었다. 이후 광복과 더불어 사우를 일으키고 제사를 다시 모시게 되었다. 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참배하면서 이장 검토를 지시한 이후 현 위치에 유택이 이장됐다. 이후 77년 성역정화사업이 진행되면서 79년 현재의 모습으로 조성될 수 있었다. 만인의총의 관리 주체는 남원시와 전북도를 오갔다. 당초 사적 제102호였던 만인의총이 유택 이장으로 인해 사적이 해제 되면서 73년 전북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됐으며 성역화 사업이 마무리 된 이후인 81년 사적 제272호로 재 지정될 수 있었다.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남원시로 관리가 이관됐으나 87년 또다시 전북도로 관리 권한이 넘어간 상황이다. 최근에는 역사적 의미 등을 되새겨 국가 차원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현재 관리사무소에는 전북도에서 파견된 5명이 정식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으며, 한해 관리예산이 약 1억 원 가량 소모된다.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된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올해로 16회째를 맞는 사생 백일장 대회도 매년 개최해 학생들에게 선조들의 거룩한 얼을 가슴깊이 되새길 수 있도록 한다. 관리사무소 이정호 담당은 “만인의사의 호국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올바른 역사관과 가치관을 정립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라며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도록 최선을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잘 정비된 사적지 만인의총만인의총은 모두 18개의 시설물로 구성되어 있다. 넓은 주차장을 지나 정문을 통해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순의탑(殉義塔)이다. 높이 15.7m로 우뚝 솟은 순의탑은 순절한 이들의 희생정신을 3개의 수직 기둥과 상단부 불꽃으로 형상화했다. 만인의총을 오르는 길은 홍살문(紅箭門)과 충의문(忠義門), 성인문(成仁門)을 거쳐 간다. 홍살문 오른편으로는 남원성 전투 당시의 전황기록과 유품 등을 전시한 기념관, 8인의 충신들을 추모하는 사적비 등이 자리 잡았다. 가장 높은 곳에는 남원성 전투에서 숨진 1만여 의사들의 유해를 합장한 만인의총(万人義塚)이 자리했다. 만인의총 아래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 충령사가 자리한다. 충렬사에는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정기원 접반사와 이복남 전라병사 등 54位(위) 충신의 위패와 함께 1만여명의 이름도 알지 못하는 무명용사의 위패를 모셨다. 남원성 전투와 관련된 정확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54위 밖에 모시지 못했다고 한다. 남원성 전투가 벌어졌던 남원읍성(사적 제298호)은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최근 일부분 약 200m를 복원했지만 성의 흔적은 세월이 흐르며 묻혀 버렸다. 남원읍성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많이 허물어져 약간의 성터만 남아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시의 확장으로 인해 그 모습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남원읍성은 원래 둘레 3.4km, 높이 5.4m에 이르며 성 내부에는 71개의 우물과 마면 16개, 치첩이 1000여개, 성 밖에는 깊이 6m의 호를 파 물을 담았다고 한다. 4대문이 있었으나 동학의거 당시 동, 남, 서문이 소실되었으며, 북문은 일제강점기 당시 헐렸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며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어, 과거 성내의 가로 구성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또 다른 전투가 벌어졌던 교룡산성(문화재자료 제9호)은 남원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해발 518m 교룡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둘레 3120m, 높이가 4.5m로 바위를 깍은 듯 정교하게 쌓았다. 지금은 홍예문만이 남아 있다. <강대용 기자>*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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