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와 기숙사만 왔다갔다 하는 나의 일상에 공부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끔씩 뭔가를 주구장창 읽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신문이든 누구의 수필이든 문학이든 나의 욕구는 반드시 충족되어야만 비로소 다시 공부를 할 맛이 난다. 나는 이런 기분이 들 때면 학교 도서실에 가서 어떤 책을 읽을까 사서 선생님께 물어보기도 하고 눈에 끌리는 책을 집어들기도 한다. 내가 이번에 읽은 책은 장튈레의 ‘자살가게’라는 책이다. 우리 반의 한 친구가 읽는 것을 보고 책 제목과 내용이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여 여태껏 계속 미루다가 이제야 읽게 되었다.나는 책을 읽을 때 책에 있는 모든 글자를 다 읽는 습관이 있다. 출판년도도 보고 책 표지 디자인도 보고 뭐 이것저것 다 본다. 우선 책의 표지에 대해 말하자면 침침한 색상에 밝지 않은 분위기이다. 제목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책 제목 밑에 장편소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중편 정도라고 생각한다. 자살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한 장면에서 멈췄다. 한 할머니께서 가게에서 목매다는 밧줄을 사가는 것이다. 아, 이 가게가 자살가게이구나. 생각했다. 자살가게에서는 자살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들을 판다. 밧줄부터 시작해서 약물, 독, 칼, 투신자살에 필요한 블록 등 자살의 여러 가지 유형을 보여 준다. 자살 가게를 계속 보고 있으면 실제로 내 주변 사람들도 많이 자살을 하고 있을 것 같고 자살이 아무렇지도 않은 행위로 보인다. 자살가게의 주인 튀바슈 부부의 막내 아들 알랑은 자살 가게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매사에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다. 그래서 다들 알랑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자기도 모르는 진짜 속마음은 다를 것이다. 튀바슈 부부는 자기 조상들 대대로 비관적이었다고 고정관념처럼 머릿속에 탁 박아버린 것이다. 아들과 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자살한 반 고흐와 마릴린 먼로에 이름을 따서 뱅상과 마릴린으로 이름을 지었다. 내가 보기에는 책 속의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책 속에서는 툭하면 자살 도구를 사러 오는 사람들을 보면 자살이 떳떳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것을 잘 나타내는 것이 자살가게의 쇼핑백의 글이다. 한 쪽에는 ‘자살가게’, 다른 쪽에는 ‘실패한 삶을 사셨습니까? 저희 가게로 오십시오. 당신의 죽음만큼은 성공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자살은 단순히 먹고 자는 것과는 다른 행위이다. 하나의 생명체, 자신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살해하는 것이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삶이 무기력하고, 사는 게 지겹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등의 이유로 죽으려고 한다. 그 사람들이 행복하면 제 손으로 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서 삶을 포기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일까. 아직 내가 고된 시련을 겪어 보지 않아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자살은 현실 도피이다. 이 세상이 나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내가 자살로 현실도피를 하면 그만이지만 지금 이 사회는 혼자 사는 사회가 아니다. 엄마와 아빠가 나를 낳으셨고 기르셨고 나는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내가 영향을 미치기도 한 존재이다.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 자살을 택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다. 다시는 내 주변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이 공기로 숨쉬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다. 자살할지 안 할지는 자유다. 그러나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은 죽고 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자살자가 아닌 자살 도구를 파는 자살가게를 보자. 가게도 이윤을 남겨야 하기에 많이 파려고 한다. 그 것이 생명과 직결되는 일인데도 돈 때문에 자신의 좋은 면만 보려고 한다. 손님에게 생애 마지막 투자라면서 성공적인 자살을 권하면서 자기가 자살하려는 사람을 도와주고 있다고 착각한다. 진정한 의미의 도움은 이득 창출이 아닌 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다. 뭐, 그렇게 진정성을 운운하면 애초부터 자살가게는 없었을 것이지만 말이다. 이런 식으로는 돈을 벌면서도 찜찜함을 없애지 못할 것이다. 소설의 끝 부분에 알랑이 자살을 한다. 도대체 왜 자살을 택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가족이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잡고 있던 생명줄과 같은 밧줄을 놓아버리고는 떨어진다. 알랑은 비록 열한 살의 어린 아이이지만 자살 가게의 분위기를 확 바꾸고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삶을 즐기게 만들었다. 손님들의 자살하려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알랑은 다른 사람의 자살은 포기하게 해놓고 정작 자신은 자살을 한다. 그런데 손님의 자살과 알랑의 자살은 확연히 다르다. 손님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고 한 것이라면 알랑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어린 알랑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대단하다. 자살가게라는 아이디어는 그만큼 사람들이 자살을 진지하게, 많이 또는 어쩌면 쉽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살가게’는 나에게 나와 멀다고만 생각했던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다. 다른 사람은 자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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