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전화벨이 울린다. 한참 바빠서 어쩔줄 모르고 경황이 없는데 약간 짜증섞인 말투로 전화를 받는다. 아내가 오늘 몇시에 퇴근할거냐고 묻길래 “지금 바쁜데 나중에 통화하자” 바쁘다는 핑계(?)로 나름 바쁜 일을 마무리하고 한숨을 돌릴 때 즈음 아내한테 좀 전에 퉁명스럽게 전화받았던 게 괜시리 미안해진다. 아내와의 통화가 아무리 바빠도 길어봐야 3분정도 일진데 이런 짧은 전화통화도 못 받아줄 바쁜 일이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겸연쩍고 미안해진다.
객지에서 직장을 다니는 친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 시간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요즘 바빠서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라고. 언제부터인가 나의 평상시 말투에서 “지금 바빠” “요즘 바빠”가 입에 붙어서 동행을 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하는 일들 중 정말 바빠서 바쁘게 하는 일들이 하루에 정말 얼마나 될까?
예전에는 집으로 오신 손님을 배웅할 때 “천천히 조심해서 가세요” 라고 말을 건네고 손님의 뒷모습이 아련해 질 때까지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게 기본예의였다고나 할까?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지만 요즘은 손님이 차 시동을 걸기도 전에 “잘가”하고 집으로 들어와 버린다.
현대사회는 느림과 여유 보다는 조급함과 빨리라는 단어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바쁘게 살지 않으면 밥도 못 얻어먹느니, 남에게 뒤쳐진다느니 하는 경쟁심의 발로라고나 할까! 바쁘고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꿈꾸는 여유. 여유란 무엇일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편히 쉬는 게 여유는 아닐 것이다. 느긋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바쁜 와중에도 느긋하고 차분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을 여유 있다고들 한다. 직장에서도 여유없이 일하는 사람들은 보기에는 분주하지만 실수가 많아서 오히려 일이 지연되기도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은 실수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같은 시간을 보낼지라도 어떤 사람은 정신없이 바쁘게 살고, 어떤 사람은 여유있게 살고 있다. 즉, 바쁘다는 것과 여유있다는 것의 차이는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이용하는데 달려있다고 하겠다.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는 초고속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마음의 여유라고 생각된다.
전남의 한 지자체는 시간을 붙잡는 ‘느린 우체통’을 설치해 방문객들로 하여금 느림과 기다림의 미학을 선보이고 있다. 시(市)로부터 무료로 제공받은 엽서 2매를 그리운 이에게 보내거나 본인에게 직접 띄우는 편지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쓰인 엽서는 1년 후에 배달된다. 바삐 돌아가는 현실에서 1년전 생각하고 느꼈던 감동을 다시한번 되새기게 하는 추억의 매개체가 되고 있다고 한다.
귀농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쳇바퀴 돌 듯 매일의 각박하고 쉴새없는 찌든 일들의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좋은 공기와 후한 인심 그리고 후덕한 여유를 누리고 또한 엄마의 품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전원생활의 동경에 대한 결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국인의 성격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는 뿌리타(不理他)와 만만디(慢慢的) 라고 한다. 뿌리타(不理他)는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 성격을 말하는데, 남이야 부정을 저지르든지 말든지, 질서를 지키든 말든, 싸움을 하든 말든 ‘자기’일이 아니면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을 말하며, 만만디(慢慢的)는 그야말로 느리고 느리게를 뜻한다. 거대한 대륙 중국은 조급함이 철저하게 무시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수천년을 지나온 나라이다. 중국인의 협상기술은 느긋함에서 나온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겉으로만 느릴 뿐 머릿속 계산은 결코 느리지 않다는 것이 알려진 정설이다. 속으로는 계산을 꼼꼼히 하면서 겉으로는 느긋하게 폼을 재는데, 빨리빨리 근성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한국인들은 더욱 조급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은 성질이 급하므로 일을 질질 끌면 반드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따라서, 투자 협상에서 빨리빨리를 주장하면 할수록 중국인들의 느긋함은 더욱 강력한 협상의 무기가 될 것이다.
급하다고 또는 바쁘다고 해서 성능 좋은 브레이크처럼 꽉 밟지 말고 서서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다면 무리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은 남이 해주는 밥이라고 하던데 오늘은 아내에게 외식이나 하자고 해볼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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