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육십령의 길목에 위치한 황석산성. 지리적 요충지의 황석산성은 7년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민초들이 숨져간 역사의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義)와 충(忠)의 고장 함양에서 민과 관이 합심해서 이룩했던 황석산성 전투는 관련 사학자나 해당 지역민이 아니고서는 잘 알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황석산성 전투는 제대로 기록되어지지 않은 전투로 남아있다. 정사에서는 수백의 관군만이 싸웠다고 전하지만 야사에는 7천의 민관이 7만의 왜구를 맞아 수일 동안 임전했다고 전한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황석산성 전투와 비슷한 남원전투나 성웅 이순신이 활약한 명량해전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이다. 황석산성에서 숨져간 이들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검증되지 않은 역사의 파편으로만 남아있다. 이번 기획취재를 통해 함양군민만이라도 황석산성 전투와 그 속에서 숨져간 이들을 기렸으면 한다. <편집자 주>1. 정유재란과 황석산성 전투의 시작 2. 민초들의 이뤄낸 황석산성 전투 3. 남원산성 전투와 만인의총4. 7만 민관군 처절했던 진주성전투5. 황석산성 전투 역사의 전면에 서야우리나라의 역사는 처절한 침탈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반도국이라는 지정학적 여건 속에 북으로는 중국이라는 거대 제국, 남으로는 일본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아 왔다. 수없는 침략 속에서는 민관군이나 민초들인 의병이 일치단결해 국난을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전후 7년 동안의 조선과 일본의 전쟁. 7년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임진왜란은 민관군이 합심해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전 국토는 초토화 될 수밖에 없었다.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해 맞서 싸운 관군들, 그리고 의병장 곽재우 등 지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민초들로 인해 임진왜란은 종식될 수 있었다. 전쟁 전 조선과 일본의 상황선조 24년(1591)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서신, 그 가운데 들어 있었던 것이 바로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를 치려니 길을 빌려라’라는 일본의 요구였다. 이 요구는 당시 조선에게는 웃음거리였다. 어찌 미개하고 약한 왜가 상국인 명을 정벌하겠냐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평화의 시대로 군사력을 천시했던 조선, 이와 반대로 전국시대로 단련된 수십만의 정병을 보유한 일본은 극명한 모습을 보였다. 전쟁 발발 전 조선은 전란이 한동안 발생하지 않은 오랜 평화의 시기로 성리학의 발전하고, 이민족 특히 일본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일본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무시하는 등 국방 정책에 소홀했다. 또한 조선은 개국 후 백여년 동안 개국공신과 그 후손의 집단으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과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선진 사림파 세력이 맞서며 권력을 둘러싼 암투와 대립반목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울러 납제도도 문란해져서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등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던 시기였다. 일본의 경우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해 100여 년 지속되던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조선과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했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성장한 일본의 전력은 조선이 상상도 못할 만큼 막강했다. 그렇게 ‘정명가도’라는 일본의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이 임진왜란이다.7년 전쟁 임진왜란의 시작1591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에서 전국의 다이묘들을 불러 놓고 조선 출병을 선언하고, 이듬해 1월 6일 정식으로 전국 영주들에게 동원령을 내린다. 그렇게 모인 병력이 모두 29만 여명으로 조선에 직접 출병하는 병력 15만여 명을 비롯해 후방 지원 병력 등이 포함됐다. 임진왜란의 첫 전투는 1592년 4월14일 부산진에 상륙한 일본군을 맞는 것이었다. 그 후 4월18일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김해에 상륙하는 등 최종적으로 5월이 가기 전에 약 20만의 병력이 조선에 상륙했다. 왜군의 침공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왜군을 격퇴하기로 하고. 유성룡을 도제찰사로 삼아 그들을 감독하게 했다. 그 뒤를 이어 신립이 북방의 병력과 충청도에 집결한 병력 등 약 7000여명을 이끌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을 맞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조선의 병력이 궤멸되면서 결국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조정과 조선군의 무능함으로 인해 한성이 함락되고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선조가 피난하는 치욕을 겪었다. 승전도 있었다. 1592년 6월 이순신이 옥포와 당포, 당항포, 한산도 대첩에서 연전연승을 거뒀으며 해전이 승리를 거둘 때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곽재우, 고경명, 조헌, 김천일, 정문부 등으로 대표적인 의병들도 일어나 왜군의 맞았다. 전열을 정비한 조선군은 1593년 2월12일 권율의 행주대첩과 7월 8일 이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육군 역시 반격을 하게 되었다. 명군도 원군을 보내며 조일 전쟁이 3국 전쟁으로 확대된다. 1592년 12월에 의주성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함에 따라 1593년 1월 명나라 원군이 이여송으로 제독으로 하여금 4만 3000명의 육군이 압록강을 건너왔고 평양성 전투에서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으며 이듬해에 육군 제독 유정과 수군 도독인 진린 역시 육군은 4만의 정예병과 수군 5000을 이끌고 참전 하였으며 1594~1596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협상 회의가 지루하게 계속되어진다.전쟁의 재발 정유재란과 황석산성임진년의 참화가 채 가지시도 않았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왜군의 침략을 재차 받는다. 조선의 대부분이 왜군에 의해 유린당한 가운데 전라도 대부분의 지역이 보전되면서 임진왜란의 전세가 조선으로 기우는 듯 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 패배의 원인을 전라도 공략에 실패한 것으로 보고 ‘전라도는 빠짐없이 공략하라’라며 작전 명령을 내리며 또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삼남지방에 머물러 있는 현재의 전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호남지방을 공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으로 이것이 정유재란의 시작이다. 숨죽이고 있던 왜군은 1597년 1월 울산과 부산 일원에 상륙한다. 그해 7월 19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며 사실상 조선의 재해권까지 확보한 왜군은 7월 말 전군을 좌우로 나눠 우선 호남 정벌에 나섰다. 왜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눠 우군의 경우 밀양, 창녕, 고령, 합천, 거창, 함양, 장수, 진안을 거쳐 전주성으로 가고, 좌군은 김해, 고성, 사천, 하동 등 물길을 따라 이동한 뒤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성에 입성하려 했다. 좌군은 4만5000여명, 우군은 7만5000여명. 우군이 많았던 것은 전주성 함락 후 북진의 주력부대였기 때문이다. 우군은 곽재우의 의병이 버티는 창녕 화왕산성은 비켜갔다. 그러나 황석산성은 그럴 수 없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육십령이고, 육십령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것이 황석산성이었다.황석산성 전투는 그렇게 1597년 8월 14일 7만여 일본군이 황석산성을 에워싸면서 시작된다.강대용 기자*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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