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을 물세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마을 공동지하수 전기요금인 셈인데 물을 쓴 만큼 비용을 분담해서 냅니다. 처음에는 마을 이장이 하던 일인데 우째 하다 보니 어리숙한 내가 몇 년 째 떠맡게 되었습니다. 스무 가구 남짓한 산골마을이라 계량기 검침하고 돈을 걷는 데는 한 시간이면 족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을에는 혼자 사시는 할머니들이 많아 물을 거의 쓰지 않기 때문에 보나마나 기본요금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막상 물세를 받으러 다녀보면 그게 그리 만만치가 않네요. 왜 그런지 말하려고 하는데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오늘 첫 번째 물세 받은 집을 소개하는 걸로 대신할까 합니다.
등구 할머니는 팔순이 다 되가는데 아직도 논 7마지기와 수백평의 밭을 가십니다. 그리고 암소도 한 마리 키우십니다. 밭농사는 농기계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오직 괭이 하나로 지으시는데 새벽부터 해가 저물도록 일을 하십니다. 할머니 밭이 우리 집 바로 앞에도 있고 우리 집 뒷산에도 하나 있어서 하루 일하시는 걸 집안에서도 볼 수가 있어 할머니가 하루동안 일을 얼마나 하시는지 본인보다도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캄캄한 밤에 집 앞에 있는 밭에서 탁탁하는 소리가 들려 짐승인가보다 하고 조심조심 다가가 보니 글쎄 등구 할머니가 랜턴을 켜놓고 괭이질을 하고 있어 깜짝 놀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 종일 일만 하시는 할머니가 나에게 할 말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밭일하는 할머니 옆을 지나가다 “할머니 힘드신데 쉬었다 하세요.~~” 라고 할라치면 할머니는 괭이를 놓고 오셔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시는데, 내가 적당한 핑계를 대고 빠져 나오지 않으면 시간이 한정 없습니다. 주제는 주로 이 마을에 시집와서 자녀들 키운 얘기인데 하도 여러 번 들어서 할머니 자제분들 이름을 이 나이에 다 외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내가 물세를 걷으려고 공책을 들고 마을을 돌면 할머니는 하던 일을 잠시(?) 접어두고 집으로 앞장서시는데 내가 야박하게 돈만 받고 바로 다음 집으로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30분은 최소한의 예의고 날씨가 화창할 때면 한 시간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오늘 드라마 1부는 얼마 전에 낳은 송아지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이고 아이고 예쁜 소야~~또 송아지를 낳아줘서 을매나 고마운지 모리겠다 하이까네 소가 눈을 껌뻑~껌뻑 하면서...” 거북등껍질처럼 까칠하고 장비처럼 단단한 손을 휘저으며 한창 열중하실 때는 내가 잠깐 자리를 비워도 계속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송아지 사진 찍느라 옆에 없다는 걸 아시고는 다가오셔서 바로 2부로 넘어 가시는데 2부 드라마는 나도 다 외는 겁니다.
“우리 봉수가 성공해서 오겠다고 집을 나서다가 돌아서서 내 손을 꼬옥 잡으면서, 어무이~~어무이~~이 돈은 지가 못 가져가겠심더 하고는 꼬깃꼬깃 접은 돈을 터억 내 놓는데, 내가 야야~봉수야~~에미는 이 돈 엄서도...”
사실 내가 오늘 물세 받으러 집집마다 다 돌아야 하는 처지가 아니라면 2부 드라마에 이어 3부 드라마까지도 들어 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하루 만에 물세를 다 걷고 싶어 “할머니~~물세 천오백원입니더” 하고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긴 듯이 재촉하여 돈을 받고는 옆집으로 갔습니다. 등구 할머니보다 두 세배는 말씀을 잘하시는 임실 할머니 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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