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한 귀퉁이에 붉은 양귀비가 피었다. 딱 한 송이였다. 잔디가 점령한 곳에는 감히 자리 잡지 못하고 자갈이 덮인 곳에 겨우 한 자리를 얻었다. 박토에 뿌리를 내리고 꽃잎을 열은 것이 대견했다. 저 꽃을 피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을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핀 꽃은 자신의 위치만큼 작았다. 혹시나 지나다니다 밟아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작아서, 애처로워서 더욱 예뻤다. 집을 나설 때나 들어 올 때마다 꽃 때문에 입 꼬리가 올라갔다. 꽃을 보는 순간은 세상이 행복으로 가득한 듯 느껴졌다. 작은 꽃 한 송이가 주는 기쁨은 컸다. 꽃이란 것이 바라만 봐도 기분을 좋게 만드는 줄 몰랐다. 마음이 선하지 못한 사람도 꽃을 보는 순간에는 선해진다. 상림에도 붉은 양귀비가 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랑건너 아저씨도 이웃집 아주머니도 상림에 핀 양귀비가 볼만하다고 했다. 모두를 입을 모야 “꼭 한번 가봐라”는 말로 마침표를 찍었다. 친구가 함양으로 놀러온 날 상림으로 향했다. 멀리서 바라보는 들판에 붉은 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수지에 붉은 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 같았다. 개양귀비였다. 습자지처럼 얇은 꽃잎은 햇빛에 요염하게 흔들렸다. 꽃잎은 바람의 길을 따라 조금씩 색깔이 바뀌었다. 짙다 못해 핏빛인가 하면 역광을 받아 투명한 선홍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바람에 꽃잎들이 한쪽으로 쏠리며 쏴르르 소리를 냈다. 소리는 먼 물결의 파도처럼 아득하게 흘렀다. 저절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순간적으로 마녀의 주술에 묶여 버린 듯 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씩 주술이 풀린 듯 발이 움직여졌다. 친구와 나는 지금의 순간을 묶어놓게 위해 사진을 찍었다. 모네가 그린 ‘양귀비 밭’이 생각났다. 아르장퇴유 부근의 전원을 담은 풍경화이다.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고 환상적인 양귀비가 피어있는 곳을 두 사람이 걸어 내려오는 모습이다. 그림속의 한 장면처럼 나도 꽃 속을 걸었다. 바람이 불면 꽃잎이 하르르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내 얼굴에도, 친구의 얼굴에도 붉은 물이 들었다. 살아가다보면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기 마련이다. 아프고 힘들 때 진심 어린 위로는 삶을 이어가게 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진정한 위로는 어떤 것일까. 붉은 양귀비의 꽃말은 ‘위로’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지독히 아플 때 사람이 주는 위로보다 자연이 주는 위로가 더 절실했다. 어디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시원을 바람을 맞으면 금세 아픈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주 자연이 주는 위로를 찾아 집을 나서고는 했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자주 산을 올랐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정상에 올라섰을 때 세상의 근심이 사라졌다. 남들도 나처럼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사는 것이 조금 이해되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풀 그리고 하얀 햇살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했다.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자연의 위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또한 기쁨과 노여움이, 사랑과 아픔이 한데 얼크러져 있다. 가끔은 세상이 불공평하고 복잡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자연 주는 편안함과 따스함이 함께 있다. 자연이 주는 위로는 넘어진 삶을 다시 일으켜 주기도 한다. 붉은 위로의 소리가 바람에 수런거렸다. “때로는 행복하고 또 때로는 아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지”하는 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오월의 상림, 양귀비가 주는 위로가 있어 나는 행복했다. 아아, 언제 또 이런 날이 올까. 이렇게 아름다운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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