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결국 모든 배는 항구로 돌아와야 하듯 모든 남자의 운명 또한 여자에게로 돌아와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젊어서는 부모 형제 계신 곳이 고향이지만 나이 들고나면 아내 있는 곳이 곧 고향일 수 있습니다. 나이 든 남자가 아내를 떠나 어딘들 편하겠습니까?
신체건강을 위해서도 그렇고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아내 옆에 있는 남자가 훨씬 더 오래 살고 치매나 우울증도 덜 걸린다는 건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고로 나이 들어가는 남자들은 아내가 어디로 가는지 또는 어디로 가려하는지 늘 살피면서 아내 치마꼬리 놓치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아내의 고향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도 이제 오십 중반에 들어서는 나이라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그동안은 그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다 서울에서 나왔고 공직생활 역시 충청이북지역으로만 돌다보니 물리적 거리가 심리적 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1987년 아내와 결혼해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살면서 몇 번 못 와본 것 같습니다. 처음 새 신랑으로 한 번 인사 왔었고, 그 후에는 경조사에 온 것이 세 번, 그게 다 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와서도 아득한 거리가 부담이 되어 오자마자 떠나기 바쁜, 그런 피상적 여정으로 스쳐가고 말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 일 모르는 것이라더니 작년 8월 말, 제가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국립부곡병원 원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어 난생 처음 경남지역에 살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면, 현재 우리나라 보건복지부는 전국에 다섯 개 국립정신병원을 권역별로 설치·운영하고 있습니다. 서울·경기권에는 국립서울병원, 강원권에는 국립춘천병원, 호남권에는 국립나주병원, 충청권에는 국립공주병원, 그리고 여기 영남권에는 국립부곡병원, 이렇게 다섯 개 국립정신병원을 설치·운영하고 있는데 원래는 이 병원들 기능이 각 권역 정신질환자,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진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 기능들이 확대되어 정신병원으로서의 진료기능과 함께 각 권역의 일반인들을 위한 정신건강증진사업들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경제적 여유가 생겨 먹고사는 문제는 많이 해결되었지만 그 만큼 더 각박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가 되다보니 우울증, 자살, 알코올, 학교 폭력, 인터넷 중독 등등 우리 국민들 정신건강 문제는 날로 심각해져가고 있기에 정부에서는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정신의료시설과 조직들을 활용하여 이런 문제들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경상남도로 내려오고 보니, 이제는 ‘어! 함양이 여기서 한 시간 반이면 가는 곳에 있네!’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한 시간 반 거리도 만만한 것은 아니지만, 안 막혀야 네 시간 가까이 걸리던 것에 비하면 심리적 거리가 확 단축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지난 오월 말에는 아내의 초등학교 총동창회에 같이 갔었습니다. 병곡초등학교 40회라고 하더군요. 학교 뒤 잔디구장을 빌려 아주 성대한 잔치를 벌였는데, 원근 각처에서 오신 반백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그 잔디구장을 꽉 메운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내가 다닐 때는 한 학년 당 두 학급이었다 하고 지금도 작은 학교인데 그럼에도 그렇게 많은 동문들이 모이는 동창회는 처음 보았습니다. 더구나 모인 동문들 상당수가 서로 일가친척이라 아내가 40회인데 처 아재는 33회고 이제 할머니가 되신 처이모, 처고모는 더 까마득한 선배님들인데 모두 병곡초등학교라는 공통분모로 수 십 년 세월을 단숨에 뛰어넘어 동심으로 하나 되는 걸 보니 아내가 가진 인연, 아내가 자란 고향이 참 부러웠습니다. 지리산 아래 청정 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고향이기에 그 고향이 길러낸 사람들 사이에도 아름다운 인연들이 생기는 것이고 그래서 그 인연들이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당겨 이렇게 모이게 하는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함양, 발음해보면 참 예쁜 이름입니다. 함씨 성 가진 아가씨 이름을 나직이 불러볼 때 나는 소리가 ‘함양’입니다. 처 아재께서 소개해주신 함양특산 산머루 와인의 이름은 이 함양의 영어표기(Hamyang)를 프랑스식으로 읽어 ‘하미앙’이라 했던데 이렇게 발음해보면 정겨운 아가씨 이름에 격조와 품위까지 더 해집니다.
그간 아내 고향에 거리를 둔 게 미안했던 건지는 몰라도 이래저래 함양이 점점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이제는 아내가 가자 안 해도 일간 또 함양을 찾게 될 거 같고 그때는 아내에게 말로만 들어왔던 함양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좀 더 찬찬히 살펴보며 이렇게 살가운 고장이 가까이 있음을 더욱 감사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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