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하고 처음 해본 농사는 첫사랑처럼 오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시골 내려와서 집을 다 짓기도 전에 토종벌을 쳤는데 십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생각이 난다. 특히 봄에 첫 분봉을 하고 하늘을 날아다녔던 일과, 가을날 벌 밭에서 파리채를 휘두르며 말벌과 싸우다 장렬하게 쓰러졌던 기억은 뇌 사진으로 저장되어있다. 꿈꾸던 시골로 내려왔지만 논농사를 짓자니 나에게는 논이 없었고 밭농사를 짓자니 또 밭이 없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논밭 없이도 할 수 있는 농사가 있었다. 토종벌 치는 일은 뒷산 아무데서나 할 수 있는 거였다. 나는 이웃 농가에서 벌통을 분양받았는데, 비록 시작은 열 몇 통이었지만, 벌은 새끼를 치고 세력이 커지면 분봉을 매년 두 번 세 번 씩 하기 때문에 2~3년만 잘 하면 벌통의 수는 금방 늘어날 터였다. 처음 시작한 열다섯 통이 한 해가 지나면 서른 내지 마흔 통이 될 것이고 한해가 더 지나면 백통 내외가 될 것이니 삼년만 부지런히 하면 이백 통으로 불어날 터였다. 벌통 한통에서 수확할 수 있는 꿀을 얼추 다섯 되로 본다면 삼년 뒤에는 이백통의 벌통에서 천 되의 꿀을 수확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니 꿀 한 되 가격에 천을 곱해 보는 일은 참으로 재밌는 수학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대량 생산하게 될 꿀을 미래의 소비자와 직거래하기 위해 아내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컴맹인 나와는 달리 아내는 컴퓨터 언어도 웬만큼 구사해서 웹에 떠다니는 공짜 툴을 다운받아 홈페이지를 뚝딱 만들었다. 홈페이지 이름은 내가 지었다. 자연의 혜택을 도시 사람들과 나눈다는 취지로 sharegreen.co.kr 이라고 지었는데 지금 같았으면 이런 멍청한 이름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쉐어그린은 무엇보다도 발음이 어려웠고 OK나 apple 처럼 한방에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의도는 좋았으나 센스가 없는 작명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아직도 홈페이지 주소를 묻는 사람에게 ‘왜 그 나누다 할 때 쉐어 있잖아요~ 에쓰 에이치 어쩌고 저쩌고 그리고 초록 그린 있자나요~지 알 이-이-엔을 부쳐서 궁시렁 궁시렁’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설명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바꾸고 싶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뒤 줄줄이 잘못 끼운 다른 단추를 모두 바꿔 끼우는 일이 번거로워 그냥 쓰고 있다. 요즘 농산물 판매 목적이라면 SNS다 블로거다 카페 직거래장터다 다양한 유통경로가 있지만, 그 때만 해도 농산물 판매는 공판장이나 농협수매가 아니면 연고판매가 주였다. 어쨌든 홈페이지를 만들고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포탈 야후에 등록했다. 인터넷 상점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토종꿀이라는 검색어를 등록했더니 검색순위 안에 들었다. 벌써 십년도 지난 일이어서 여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 때 인기 있었던 드라마 대장금의 작가한테서 연락이 왔다. 드라마에서 토종꿀을 채취하는 씬을 찍어야하는데 전문가(?)인 내가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전화였다. 인터넷으로 토종꿀을 검색해서 내가 토종벌 전문가(?)인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그때 내가 그 당시 국민 드라마였던 대장금의 한 씬을 제작하는데 나의 벌들을 출연시키고 제작협찬을 했더라면 어쩌면 대장금 인기를 업고 꿀 판매에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때 TV를 안본지 오래되어 대장금인지 대장간인지 얼핏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게 그렇게 인기있는 국민 드라마인지도 몰랐고, 내가 토봉꿀 업계의 전문가가 아닌 원조초보 라는 게 뽀롱 날까봐,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마치 논문준비로 바쁜 교수님처럼 목소리를 깔고 젊잖게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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