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공식 인정된 국가<國歌>는 없다. 광복 이후 애국가로 대신해 오고 있다. 애국가 작곡자는 안익태로 알려져 있으나 작사자는 1955년 이래 정부 발표는 작자미상이다. 1955년 주한미대사관에서 미국 대백과사전을 만드는데 한국의 애국가 작사자를 알려 달라는 요청이 왔다. 정부는 작사자 안창호 작곡자 안익태로 통보 하려다 언론에 흘렸다. 그랬더니 애국가 지었다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정부는 국사편찬위원회 밑에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해 4월 4일부터 두달간 조사하게 했다. 조사위원 19명 중 친일파가 절반이 넘는 애국가작사자 조사위원회에서 후보로 떠오른 안창호, 윤치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은 다 결정적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여 애국가 작사자는 미상으로 보고 하여 정부는 애국가 작사자 미상으로 공식 발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사단에서 애국가 작사연구를 6년간 해 본 결과는 도산 안창호가 애국가 작사로 화정되었다. 2012년 8월 22일 프레스센터에서 오동춘 안용환 두 학자의 논문 발표를 통하여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로 주장했다. 오동춘 안용환 공저로 <애국가와 안창호>저서도 2013년도에 발행했다. 흥사단은 두 번째 애국가 작사자연구 논문 발표행사를 지난 3월 31일 국회도서관 지하 소회의실에서 열었다. 이 행사에는 안창호설, 윤치호설, 공동작사설까지 발표하게 하여 역시 안용환 윤정경 두 분의 발표를 통하여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로 다시 확정짓게 되었다. 순국애국자 안창호<1878-1938>는 1902년 이혜련 아내와 함께 교육학 전공차 미국에 갔으나 무지한 교포지도가 급선무이므로 유학을 포기하고 노동현장에 뛰어 들었다. 귤 하나를 따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라고 가르쳤다. 미국 온 지 5년만에 한국에 한일협약, 을사늑약, 정미칠조약 등으로 나라가 망해가는 위기를 느껴 애국비밀단체 조직차 1907년 2월 20일 일본을 거쳐 제물포항으로 귀국했다. 3월 초순 선천예배당에 들려 “두만강과 백두산 마르로 닳도록”으로 들리는 찬미가 소리에 영감을 얻어 그 길로 평양에 올라가서 이틀 금식하며 4계절 배경의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찬미가를 4절까지 지어 선천 예배당에 보냈다. 올드랭 사인 곡에 얹어 부르는 이 노래는 교회는 물론 선천 일대 애창곡이 되었다. 이런 사실은 1907년 3월 20일자 당시 대한매일신보 신문에 보도 되었다. 이 애국찬미가가 오늘의 애국가 원형이다. 1907년 3월 초순 도산이 선천 예배당에 왔다가 애국가를 지어 보내기까지를 직접 목격한 김정수<1984-1976>권사의 목격증거가 종손자 윤정경의 시디<CD>에 녹취 되어 있다. 1922년 독립자금 전달차 상해에 건너가서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를 만난 윤형갑<1904-1961>은 어느날 도산으로부터 애국가 작사자가 도산 자신임을 듣게 된다. 미국의 클레멘타인 민요처럼 애국가가 민중에게 불러지도록 내용을 고치거나 지은이를 밝히지 말라는 당부까지 들은 청취증거 역시 종손자 윤정경에 의해 시디에 녹취되어 있다. 상해에서 3년간 안창호 비서를 지낸 구익균<1908-2013> 독립운동가도 동아일보<2011.10.25> 기자 대담에서 애국가는 안창호 선생이 지었다는 말을 직접 안창호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2013년 103세로 돌아가신 빙지일<1911-2013>목사도 찾아간 흥사단 단우들에게 애국가 작사자가 안창호임을 밝혀 주었다. 안창호는 자기가 지은 애국가를 자신이 설립한 평양대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상해 임시정부 아침 조회때마다 우렁차게 앞장서 불렀다. 도산은 거국가 애국가 모란봉가 학도가 등 많은 노래 가사를 창작했다. 도산 안창호는 세계평화주의자로 미국에서도 크게 존경받고 있다. 이광수, 장리욱, 강제한, 허영숙 등의 증언도 도산이 애국가 작사자임을 잘 밝히고 있다. 안창호 애국가작사설에 맞서 온 윤치호는 흥사단에서 6년간 연구해 본 결과 친일거두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은 결정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 역술 찬미가는 저술이 아니며 애국가 가사지는 1907년작이 아니고 자녀들의 권면으로 1945년 9월경 쓴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1월 14일 미국 아틀란트 에모리대학에 소장 중인 윤치호 애국가가사지는 친일 면죄부를 받기 위해 1945년에 썼던 것이며 한 노인의 명상록에는 하지중장과 이승만 대통령에게 친일파를 봐 달라는 글이 적혀 있음도 보았다. 그리고 60년간 쓴 일기에 애국가 소리가 없었다. 신한민보 윤치호의 국민가도 애국가 작사자로 결정적 근거가 없었다. 신민회사건 이후 변절한 친일 거두 윤치호는 결코 애국가 작사자가 될 수 없다. 올해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정부는 60년간의 애국가 작사자 논란을 이제 매듭짓고 흥사단에서 연구해 본 결과를 토대로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친일파의 파렴치한 행동으로 민족정기가 짓밟힌 우리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역사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애국가는 앞으로 통일 한국에서 불러야 할 나라사랑 노래이다. 애국가 작사자는 남북 7천만 국민으로부터 존경 받는 도산 안창호임을 올해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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