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지배층의 자기 합리화에 민중전쟁 의미 퇴색항전 주체인 백성들의 호국혼 의도적 외면 1597년 8월 16일, 2만 7천의 선봉대를 포함한 왜군 7만 5천여 명이 함양 황석산성을 에워싸고 끝없이 밀려들었다. 안음(안의), 함양, 산음(산청) 등 인근 7개 군현에서 모여든 7000여 명의 조선 의병과 백성들은 가족과 나라의 명운을 건 혈투를 벌였다. 해발 1190m의 험준한 함양 황석산 언저리에 자리한 황석산성은 호남과 충청지방을 향하는 길목. 이곳을 밟고 육십령을 넘어서면 전북 장수를 거쳐 호남과 충청, 서울로 나아갈 수 있는 요충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앞선 임진 침략 때 전라·충청도를 손에 넣지 못해 거의 손에 들어온 승리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유재란 때는 처음부터 군사를 우군과 좌군으로 나눠 전라·충청 진출의 요지인 함양과 남원으로 진격시켰다. 성문이 허물어지고 왜군이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자 조선 민중들은 10배가 넘는 왜군들 속에서 싸우다 죽어갔고, 살아남은 부녀자들은 깨끗한 죽음을 택했다. 수많은 이들이 다투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산화했다.(‘피바위’ 유래) 절반이 넘는 군사를 희생하며 힘겹게 성을 수중에 넣은 왜군들은 허탈감과 충격에 휩싸였다. 누가 승리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저항으로 자기들에게 타격을 입힌 군사들이 갑옷이 아닌 삼베옷과 누더기를 걸친 민초들이었던 것이다. 아들들은 처참한 난도질에도 끝까지 부모의 몸을 감싸고 죽어갔고, 하릴없이 부모와 지아비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부인과 딸들은 욕을 당하기 전에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다. ‘일문삼강’(一門三綱 한 가문에서 충·효·열 삼강이 모두 나왔다는 뜻)이라는 보기 드문 유교적 휴먼 스토리도 여기서 나왔다. 그런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본 왜군들은 조선 백성들의 열렬한 ‘충·효·열’에 소름이 돋았다. 죽을 곳에서 깨끗하게 죽음을 택하는 것처럼 강렬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행동은 흔치 않다. 왜군들은 정규군도 아닌 민초들에게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고 승리하고서도 정신적으로는 완벽히 패배한 것이다. 이것이 정유재란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함양 황석산성 싸움이다. 산성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김해부사는 일찌감치 야반도주하고, 남은 의병과 백성들이 호국혼을 불태워 최후를 맞은 민중들의 전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잊혀져야 했던 역사다. 당시 임금과 사대부 지배층은 끝없는 당쟁과 전쟁 징후에 대한 판단 착오로 왜란의 단초를 제공했다. 전세가 급해지자 백성들을 속이고 도망쳐 자기 안위만을 도모했다. 그 실착과 배신을 덮기 위해 백성들의 공은 깎아내리고 자기들의 공은 부풀려야 했다. 그래서 정규군이 개입되지 않은 전투는 애써 평가절하하고, 가급적 덮어두려 했다. 의병장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이 단적인 예다. 일본 측은 이 전투를 더욱 애써 폄하하려 했다. 비정규군과의 싸움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고 전쟁 수행 동력을 상실한 사실이 알려져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수백 년 동안 이어지던 황석산성 순국선열에 대한 제향과 관련시설도 없애 버렸다. 같은 시기에 치러진 남원성 전투(만인의총)에 뒤지지 않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함양 황석산성 싸움이 왜곡되고 조명받지 못한 까닭이 여기 있다. 정규군 없이 치른 민중전쟁은 조선과 일본 양측에 공히 달갑지 않은 역사였던 것이다. ◆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선 함양군 전쟁이 끝난 100여년 후(1714, 숙종 40년)에 조정에서는 이 전투에서 순국한 곽준, 조종도 등 주요 지휘자들을 서훈하고,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황암사’를 건립(사액)하고 봄가을로 제향을 지냈다. 그러나 제향은 전투를 이끈 일부 사대부 지휘자들에 초점이 맞춰졌고 함께 순국한 민초들은 소외됐다. 황암사는 일제 강점기에 철폐됐다가 2001년에 중건되면서 추모행사가 재개됐다. 1987년에는 황석산성 전투 유적지가 국가 사적(322호)으로 지정되고, 총 2.9km 가량의 산성 중 500m 정도가 복원된 상태다. 현재 제향, 추모행사 등은 민간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최근 함양군에서 황석산성 전투에 대한 역사 바로세우기와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왜곡된 역사와 평가절하된 전투의 가치를 재조명해 황석산성을 국가성역으로 만들고 선조들의 호국혼과 역사적 평가를 바로세우자는 것이다. 작년 12월 함양군과 국가원로회의(상임의장 이상훈 전 국방부장관)는 황석산 사적지의 복원과 국가 성역화에 힘을 모으기로 협정(MOU)을 맺었다. 사적지 완전 복원과 국가 차원의 제향과 관리, 황석산 전투의 역사교과서 등재, 주변 관광·문화자원과 연계 개발 등이 목표다. 국가와 도 차원에서 사적지 복원·관리와 추모행사 등이 이뤄지고 있는 금산 칠백의총과 남원 만인의총 수준의 예우를 이끌어내기 위해 학술연구용역 등 예비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 전투의 의의와 가치를 완전히 새롭게 조명해 걸맞은 예우를 하자는 것.사적지 원형 복원, 국가 차원의 제향과 관리, 황석산 전투의 역사교과서 등재, 주변 관광·문화자원과 연계 개발 등이 목표다. 희소가치 높은 자발적 민중호국전투인 황석산성 전투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제작을 위해 방송 관계자도 접촉하고, 소설 등 관련 집필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양한 국내자료와 일본 측 사료를 찾아 이 싸움을 10여 년간 연구한 황석역사연구소 박선호 소장은, 양측의 전투참가 인원·양측 피해·전투 기간·전투의 영향 등 많은 부분의 진실이 왜곡되고 묻혀져 있다고 주장한다. 정사 기록과 개인 문집 등의 다양한 기록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들이 발견된다. 이번 성역화사업을 통해 잘못된 역사를 체계적으로 바로잡고 소외된 민초들의 한을 풀어 지역의 오랜 숙원을 해결하기를 바란다. 이 사업이 성공하면 황석산·기백산·거망산·금원산·화림계곡·용추계곡 등 천혜의 자연자원과 인근의 팔담팔정·남계·청계서원 등 선비문화와 스토리, 독특한 산성문화 등을 연계한 함양의 정신·문화·자연 결합형 체험관광명소가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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