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전면 백운산에 자리한 ‘화과원(華果院)’을 국가사적지로 지정하는 민간주도 움직임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관련기사 혜원스님 인터뷰> ‘화과원’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인 백용성 선사가 선수행과 생산적 근로활동을 병행하여 나간다는 선농불교사상을 실천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29년 개간한 농장이다.  화과원 국가사적 지정 추진위원회는 19일 낮 12시 창원아리랑호텔에서 임창호 군수를 비롯한 관계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화과원 국가사적 지정 추진위원회 발기인대회’를 열고 대정부건의안을 채택했다. 발기인으로는 조진래 전 정무부지사를 비롯해 김윤근 경남도의회 의장, 진종삼·정인선·이태일·김종규 전경남도의회 의장 등 전·현직 도의원, 불교계 학계 재계 인사 등 80여명이 참가해 화과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반영했다. 이날 추진위원회는 위원회 명칭을 당초대로 ‘화과원 국가사적 지정 추진위원회’로 확정하고, 화과원이 사적지로 지정될 수 있도록 다각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기로 했으며, 위원회와 별도로 경상남도의회 차원의 사적지 지정 건의안도 채택해 정부에 제출키로 했다. 발기인들은 사적지지정 대정부건의문을 통해 “화과원은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농장’으로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적지임에도 기념물로만 지정돼있을 뿐 보전 및 복원대책이 전무해 유물훼손이 가중되고 있다“며 ”순국 선열의 독립정신과 숭고한 민족혼이 후대에 계승될 수 있도록 조속히 국가사적지로 지정해 달라“고 건의했다. 또한, “6·25전란을 겪으면서 보존되지 못하고 폐허처럼 방치돼 안타깝다”며 “법당터·선방터 등 9개소의 건물터에 축대·석조물이 남아있고,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 당시 심어놓은 과일나무가 남아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국가사적지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백용성 선사는 1879년 16세 때 출가해 불교에 입문해 승려로 살아오면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분으로, 1919년 3·1 독립선언서에 네 번째로 서명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백 선사는 옥고를 치른 후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 8부 능선에 30여ha(90여만 평)의 임야와 황무지를 개간해 화과원을 만들어 과수·야채·감자 등 농작물을 심었으며, 도자기를 구워 판매하기도 했다.   이렇게 마련된 독립자금은 전북 군산항을 통해 중국 상해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에게 직접 전달됐고, 또 중국 용정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투사들에게도 보내져 항일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된 것으로 전한다. 백 선사는 또한, 1921년 일제 강점기 한글 보급을 위해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한데 이어 1928년에는 한글판 화엄경을 펴내기도 하는 등 일평생을 일본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정부는 이 같은 백 선사의 독립운동공로를 뒤늦게 인정하고 1962년 건국공로 훈장과 1990년 은관문화 훈장을 수여했으며, 국가보훈처는 1998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했다. 2000년 9월에는 출생지인 전북 장수군의 생가지는 죽림정사로 복원되어 그의 업적과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화과원은 보전 및 복원대책 없이 방치돼 있으며 인근에는 제대로 된 도로조차 없어 관심 있는 사람의 접근도 어렵고 위험한 상태다. 이날 화과원 사적지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진종삼위원장은 취임사에서 “광복 70년을 맞는 뜻깊은 올 해 독립을 위해 초개처럼 한 몸을 던진 순국선열의 뜻을 되새기게 된다”며 “수많은 독립지사의 독립자금원이 되었던 화과원을 반드시 사적지로 지정하고 보전해 후손들이 그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하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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