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년 전, 가을이 시작되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아는 이 하나 없는 함양으로 이사를 왔다. 이곳에 뿌리를 내리려면 친구가 필요했다. 친구를 찾아 나섰다. 오래된 벗이 있는 곳, 언제나 반갑게 사람을 맞아주는 곳, 바로 도서관이었다. 함양도서관은 1963년 재일본 함양군인회의 지원으로 개관하여 함양군 교육청이 관리한다. 작은 도서관이었다. 그곳에서 책들을 빌려 읽었고 DVD영화를 빌려 보았다. 모두 공짜였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보내고 봄을 보냈다. 낯선 타향에서 책을 읽으며 점점 함양에 익숙해져 갔다. 요즘도 삶에 지칠 때 도서관을 찾는다. 도서관은 나에게 있어 치유의 장소이다. 도서관 열람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펼친다. 그리고 집어서 가져간 뜨거운 믹스커피를 마신다.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그 순간 나를 둘러싼 세상이 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치 봄날의 햇살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남편이 “도서관에 왜 가노?”하며 질문을 던졌다.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커피 마시러 간다”고 했더니 “참 싸게 노네.”라는 소리가 돌아왔다. 싸게 논다? 그 말이 정답이었다. 나는 ‘싸게 노는 여자’였다. 도서관은 싸게 노는 나에게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다. 요즘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최하고, 한국도서관협회에서 주관하는 공공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에 선정되어 강좌를 실시하고 있다. 인문학 강의도 듣고 지역탐방도 가는 프로그램이다. 모두 무료이다. ‘길 위의 인문학’이란 강의를 들었다. 강의 내용 중, 세상에는 인문학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인문학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책읽기를 좋아하고, 사유하기를 좋아하고, 그래서 무언가를 창작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인문학적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인문학적인 유형에 딱 들어맞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사람들은 모두가 인문학적인 성향을 지녔는지 모른다. 심지어 책읽기 싫어하는 사람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면서 창의적인 삶을 살아간다. 다만 그것이 눈에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오후에는 합천에 있는 뇌룡정과 용암서원을 탐방했다. 뇌룡정은 남명 조식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쉬운 말로 하자면 서당이다. 그리고 용암서원은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졌다. 모두 근래에 복원이 이루어졌다. 오월의 햇살이 한참 농익어 가고 있을 때 목적지에 도착했다. 용암서원과 뇌룡정 앞으로 넒은 들이 보였다. 좌측으로 하천이 흘렀고 하천 건너 연두빛의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강의를 듣기위해 온 사람들은 농부들이 아니었다. 모두들 나름대로 똑똑했다. 건물 복원에 대해 잘되었다, 잘못되었다 말들이 많았다. 다들 이 강의를 듣기 전에 공부를 많이 한 듯 했다. 사실 나는 그런 것들에 무관심했다. 관심이 가는 것은 바람이었다. 용암서원 대청에 앉아 있으니 바람이 불어왔다. 뺨을 스치는 느낌이 청량했다. 눈을 감고 싶었다. 허나 강사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아 감겨오는 눈을 부릅떴다. 졸리 운 것이 아니라 대청에서 눈을 감고 바람을 맞고 싶었다. 대청에 앉아 믹스커피를 마시며 하늘도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침묵을 즐기고 싶었다. 침묵······, 내가 입을 다물면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 가끔은 입을 다물고 자연의 소리를 들어보면 어떨까. ‘붕붕붕’ 말벌이 집짓는 소리도 듣고, 바람이 ‘사라락’ 작약봉오리를 흔드는 소리도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도서관에 가는 이유는 침묵 때문인지 모른다. 그곳에서 나는 오롯이 침묵 속에 있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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