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비록 다섯 마지기지만 경력이 붙으면 농사는 얼마든지 늘어날 터였다. 벌 농사, 된장사업, 알밤농사 등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된 것이 없었기에 이번에는 덤비지 말고 신중하게 잘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사실 나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귀농하고 3년간 벌이가 없었기에 나는 거들이 나 있었다. 나는 처지가 다급해질 때마다 수학공부를 하며 용기를 얻었다. 논 한마지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입에 앞으로 늘려가게 될 논 마지기 수를 곱하기 하면 힘이 났다. 나는 논농사 정도야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심정으로  마을에서 논농사를 제일 크게 하는 이장님과 같이 일을 하기로 했다. 요즘 같으면 행정기관을 통해 필요한 만큼 신청하고 때맞추어 배달된 모를 심는 방법도 있지만, 그 때는 선택의 여지없이 모를 직접 만들었다. 우선 산에서 황토를 파온 뒤 채를 쳐서 상토로 사용할 고운 흙을 만들었다. 그리고 모판에 그 상토를 채워 사전에 불려놓은 볍씨를 파종하고 하얀 부직포를 덮어 발아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발아가 되면 모판을 다시 논 한구석에 만든 못자리로 옮겨 부직포를  덮고 모내기할 때까지 키웠다. 여기까지는 재밌었다. 황토를 걸러 모판 상토를 만드는 것은 흙 놀이였고, 볍씨가 발아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원예였다. 그런데 모내기할 때가 되어 못자리에서 모판을 논둑으로 옮기는 건 재밌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 못자리에서 자란 모는 뿌리가 제법 깊이 내려 모판을 떼어 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나는 다섯 마지기 농사였지만 이장님은 오십 마지기라 일을 같이 하다 보니 오십다섯 마지기 일을 같이 해야 하는데 이건 놀이도 원예도 아니었다. 돌다리는 그냥 건너면 되는데 쓸데없이 두드려보느라 허리가 아파왔다. 이 넘의 돌다리는 왜 이리도 많은지... 게다가 내가 짓는 논 다섯 마지기는 다락논이라 여름에 풀 베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나의 농사철학으로는 굳이 풀을 벨 필요가 없었지만 지주가 논을 망친다고 눈치를 줘서 나는 내가 짓는 농사에 내 철학을 펼칠 수가 없었다. 예초기를 메고 비탈진 논둑으로 돌격하면서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을에 추수할 때 나는 벼농사가 다시 좋아졌다. 방제를 하지 않았는데도 처음으로 지은 벼농사는 대풍이었다. 나락을 마당 가득 펼쳐놓고 말리는데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내려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드디어 나는 해내었고 나는 스스로 나를 진짜 농부로 인정하였다. 그런데 지주인 서상댁의 견해는 달랐다. 그리고 같이 농사를 지은 이장님의 견해도 내 생각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물론 사람의 생각과 견해는 다양하기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한 가지 사실을 정반대로 보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세대차이인가? 문화차이인가? 둘 다 아니었다. 세대차이라고 보기에 이장님과 내 나이는 세대를 뛰어넘을 정도가 아니었고, 문화차이라고 보기에 서상댁 할머니도 나도 똑같이 쌀밥에 김치를 먹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뭐가 맘에 안든다고 딱 꼬집어 말하지는 않는데 좌우지간 그들이 보기에 나는 진짜농부가 아니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을까? 나는 약 한번 안치고도 대풍을 이루어냈는데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나를 관심농부에서 재분류 해주지 않는 걸까? 이건 중요한 일이었다. 관심농부로 계속 남는다는 것은 더 이상은 농사를 늘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나에게 마을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했다.  한편, 그 해 가을에 나는 이웃 어르신의 권유로 곶감을 깎기 시작했다. 곶감농사는 내가 그해 가을부터 지금까지 십년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유일한 농사인데, 나는 지금까지 곶감농사를 자식을 키우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지어오고 있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안 되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하고 있다. 문제는 이 자식이 부모 심정을 몰라주고 매년 속을 썩인다는 것인데...(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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