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이어지는 이야기> 우리 집 바로 위에 묘를 파는 이야기 결론부터 말하면 파던 무덤은 도로 묻고 마을 뒷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위치를 옮겼다. 결론이 좋게 났지만 그 결론이 쉽게 난 것은 아니다. 파내고 있는 밭이 비록 내 땅은 아니지만 내 앞마당 같은 곳이기에 무덤을 써서는 안 된다고 하니, 상주되는 사람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누가 너에게 이 동네에 집을 지으라고 했냐’고 호통을 쳤다. 서로 간에 지할 말만 하다 보니 분위기가 고약해졌고, 오래된 이야기라 내가 어떻게 설득을 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는데, 수구초심이라는 문자까지 써가며, 고향에 묻히러온 고인도 자기 고향땅에 살러온 사람과 불편한 이웃이 되기를 원치 않을 거라는 설득 반에, 묘지사용에 관한 법도 엄연히 있으니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라고 협박 반을 더하여 해결이 되었던 거 같다. 그 뒤로도 우리 집 앞, 옆에 묘를 쓰려는 시도가 두 번 더 있었지만 이번에는 고맙게도 두 번 다 사전에 나에게 양해를 구하러왔다. 순순히 동의해주지 않는 나에게 한 사람은 크게 삐쳐 돌아갔고, 다른 한 사람은 나를 멱살잡이하고 패대기치고 갔다. 어쨌든 박힌 돌을 두 개 빼고 나니 더 이상은 집 주변에 묘를 쓰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대략 5년 전 부터 우리 마을에도 꽃상여가 사라졌다. 장례문화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뀐 것인데, 그 전에는 귀농하고 매년 한 번 이상 상여를 메었고 상이 많을 때는 한 해 세 번까지도 메었다. 스무 가구 남짓한 조그만 마을에 무슨 상이 그리 많이 났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수구초심이라고 고향 떠난 사람이 죽어서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그 상여까지 메다보니 솔직히 아무개네 누가 죽었다더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상여 멜 생각에 부담부터 되었다. 내가 40대 초반에 귀농했으니 그 때는 마을에서 제일 젊은이였다. 어르신들은 나더러 유군이라고 불렀고 아내는 새댁이었다. 시골에는 상부계라는 것이 있어서 상이나면 계원들이 상여를 메는데,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고 노인들만 남아있다 보니 힘쓰는 일에 귀때기가 새파란 막내가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쇠 파이프로 만든 상여받침이 어찌나 무거웠던지 한 해 세 번 메던 때에는 어깨가 고장 나서 몇 달 고생했다. 상여 메고 나서 어깨가 아프다고 하니 요령이 없어 그렇다고 하는데, 내가 남들처럼 힘들 때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다는 건지 아님 무거운 상여를 가볍게 메는 특별한 비법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다 언젠가 내가 강력히 주장하여 상부 곗돈으로 가벼운 알루미늄 상여받침을 구입했는데, 분하게도 두 번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화장하는 방향으로 장례문화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 어렵게 구입했던 새털처럼 가벼운 상여받침은 지금 마을회관 창고에서 5년째 잠자고 있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어쨌든 굴러온 돌이 자리 잡느라 고군분투하는 동안 새로운 돌들이 많이 굴러 와서 지금 운서마을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보다 수가 더 많아졌다. 마을의 옛 이름은 소연(巢燕)이라 하여 제비 집이라는 뜻인데 제비둥지처럼 작은 마을이 가파른 산에 걸려있는 형상이라 그리 불리었다 한다. 아직도 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버스 정류장에서 마을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작은 오지마을인데 뭐가 좋다고 자꾸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운서마을에는 지금도 돌이 계속 굴러 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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