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2년 2월에 20여 가구가 사는 엄천 강변 운서마을에 귀농하고 새 집을 지었다.요즘 많은 귀농관련 책에서 권하는 것처럼 좀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도시에 살던 아파트는 세를 주고 시골에 빈집을 수리해서 한번 살아보다가, 살만하다 싶으면 땅도 사고 집도 짓고 했을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좋으면 그냥 집짓고 사는 거지, 살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게 인생이네 하고 살면 되는 거지, 이래저래 재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건 나는 그랬다는 것이고, 앞으로 귀농할 사람들에게 이게 정답 이라고 말하는 건 결코 아니다. 솔직히 나에게 귀농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도시의 아파트는 매년 시세가 올라가고 시골에 새로 지은 주택은 계속 감가삼각만 되니 잘 생각해서 결정하시라고 권한다. 판단은 본인 몫이지만 귀농사례를 지켜본 바에 의하면 경제 감각이 나처럼 둔해서 오자마자 집부터 짓는 사람이 시골에 좀 더 빨리 정착하는 것 같다. 돌아갈 데가 없으면 죽기 살기로 덤벼들 것이고 그렇게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면 아무래도 승산도 높을 것이다. 엄천 강이 내려다보이는 운서마을 위 묵정밭에 살림집을 짓는데 3개월가량 걸렸다. 집짓는 동안은 마을에 혼자 사시는 돌정지댁 할머니 문간방을 빌려 4식구가 기거했다. 운서마을에 초등학생이 있는 가족이 들어 왔다카드라~는 소문이 퍼져서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이 들여다보러 오는데, 막상 와보면 남의 집 좁은 문간방에 냄비하나 밥그릇 수저만 달랑 가지고 복닥거리고 있으니, 필시 도시에서 사업이 망해 야반도주했든지, 아니면 IMF때 직장 잃고 시골에서 농사나 짓겠다고 흘러든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구경 온 이웃들 눈에 불쌍하게 보였던지 따뜻하게 지내라고 장작을 많이들 가져다 준 덕분에 겨울을 그때처럼 따뜻하게 지내본 적이 없다. 넘치는 장작을 처리하려고 많이 때다 보니 방은 항상 자글자글 끓어 우리 가족은 돌판 위에 삼겹살처럼 노릇노릇 익다 못해 타기도 했다. 집은 서양식 목조주택으로 전문건축업자에게 알아서 잘 지어달라고 맡겼다. 집은 세 번 지어봐야 맘에 드는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귀농 첫 해엔 우리 4인 가족이 기거할 살림집을 짓고, 다음 해에 사랑채 한 동, 그 다음 해에 또 민박용 사랑채 한 동 모두 세 번 집을 짓고 나니 비로소 다시 집을 짓는다면 이제는 제대로 잘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집을 세 번 지어보기 전에는 절대로 맘에 드는 집을 지을 수 없다는 말이어서 내가 지은 주택 3동에 나는 이러저런 불만이 많았다. 불만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머니를 쓰는 것이어서 집짓고 나서도 엉뚱한 돈이 많이 들어갔다. 한마디로 비싼 수업료를 냈다는 말이다.  그건 그렇고 집짓는 중에 생긴 에피소드 하나. 첫 삽을 뜬지 두 달 가량 지나 주택의 겉모습이 다 갖춰지고 내장공사에 들어갈 즈음이었다. 4월 어느 화창한 날 아침이었는데, 우리집터 바로 위 밭에서 포크레인이 땅을 파고 있고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것이었다. 뭐지? 포크레인으로 밭갈이 하는 건 아닐 터이고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헉~묘를 만들고 있었다. 세상에 ~우리 집에서 불과 열 걸음 스무 걸음 거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은 마을 어르신이고 나머지는 첨보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여기 새 집을 짓고 있는데 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이 바로 옆에 묘를 쓴다는 거지? 귀농인은 투명인간인가 싶어 한창 땅을 파고 있는 포크레인을 멈추게 하니 그제야 내가 보이는지 모두들 나를 쳐다본다.(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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