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전면 백운리에 있는 영은사지(靈隱寺址)에 있는 돌장승* 앞이다. 영은사는 신라시대 영은조사가(靈隱祖師) 백운산 자락에 개창한 사찰이다. 구전에 의하면 19세기말 폐사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옛 절집은 사라지고 돌장승 두 기와 스님들의 부도가 남았다. 석장승은 사찰 경계석과 더불어 사악한 무리의 절집 출입을 단속하는 목적으로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각각 ‘우호대장군(右護大將軍)’과 ‘좌호대장군(左護大將軍)’라고 새겨져 있다. 좌호대장군 오른쪽 아랫부분에 적혀 있는 ‘건륭 삼십년 을유윤이월일((乾隆 三十年 乙酉閏二月日)’이라는 간기(刊記)와 백운암 입구에 있는 부도군의 연대 기록으로 보아 1765년(영조 41)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호대장군은 머리에 큰 상투를 얹었다. 툭 튀어나온 둥근 눈, 큰 주먹코, 꼭 다문 입과 입 주위에 수염이 살짝 바람에 날리듯 표현되었다. 좌호대장군은 관모를 쓴 것 같은 머리 부분이 특이하고 나머지 외형은 우호대장군과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조각이 뚜렷하며 익살스러움이 잘 나타났다. 세련된 솜씨는 아니지만 친근하게 느껴진다. 과장된 이목구비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마치 깊은 산골에서 주름투성이의 순박한 농부를 만난 것 같다. 천진스러워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웃음이 절로 난다. 석공은 많은 사람에게 웃음을 보시한 것이다. 돌장승을 남겨두고 산길을 걷는다. 부도를 보기위해 백운암으로 간다. 길은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목적지에 다와 가니 개들이 짖는다. 반기는 것인지 경계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꼬리를 마구 흔들어 대며 찢는 것을 보니 반기는 것도 같다. “개자슥들”하며 나도 손을 흔든다. 귀여운 놈들이다. 절집 밑에는 민가가 한 채 있다. 저 녀석들은 절을 지키는 것인지 민가를 지키는 것인 알 수 없다. 다만 낯선 이가 방문을 하니 저도 목 터져라  주인에게 일러주는 모양이다. 봄을 재촉하는 듯 계곡물소리가 촬촬촬 거린다. 이제 막 추운 겨울을 지나왔을 뿐인데 벌써부터 물소리가 시원하게 느껴진다. 물소리 흩어지는 곳에 부도**가 놓여 있다. 영은사지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여러 기의 부도로 보아 큰 스님이 많이 주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명문이 새겨져 있어 조선시대 후기의 지방 사찰과 부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나는 부도를 향해 손을 모아 합창을 한다. 부도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런 모양으로 조성되었다. 대부분 석종의 모양을 하고 있다. 회색빛 돌 위에 파란 이끼가 자리를 잡았다. 마치 꽃 같다. 이끼가 꽃처럼 피어 하얗게 말라가고 있는 것도 보인다. 죽음을 품은 돌 위에  삶과 죽음이 또 공존하는 셈이다.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어떻게 죽는지 결정된다. 그럼 잘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고, 사고 싶은 것 마음껏 사는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라고 했다. 선(善)하게 사는 것, 그것이 잘사는 방법이라고 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말할 수 있는 일이지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점점 메마르고 삶은 박제되어 간다. 나는, 우리는 점점 본래 성품인 선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선함을 잃어버린 다는 것은 선의 정신인 예(禮)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삶의 경직을 풀기 위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이것을 회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음속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부처님이 하시는 ‘말없는 설법’인 모양이다.*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9호**경상남도 문화재자료5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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