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보처럼 생각될까요?2014년, 우리나라는 그 어느 해보다도 부실과 불신의 실체들이 싱크홀처럼 수없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세월호 침몰, 리조트 체육관 붕괴, 대형카드사 정보 유출, 갑질 논란 등 국민들의 슬픔과 분노, 서로간의 불신과 비방으로 연일 언론매체를 가득 채웠습니다. 우리가 맞은 이러한 참사는 양심과 원칙을 저버리고 안전과 인권에 눈감아 버린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우리 사회의 물질만능주의 가치관이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하고, 돈이 곧 권세로 변질되는 ‘갑질 사회’의 부조리를 배태하고 말았습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부정직한 탐욕은 더불어 살아가며 배려하고 존중하는 ‘인간됨의 사회’를 거부하고 오직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불법과 비리도 서슴지 않는 ‘인간성’ 파멸이었습니다. 베른하르트 부엡은 이러한 부정(不正)한 이 현실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 ‘정직’임을 그의 책 “왜 다시 정직인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정직은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음’이라는 사전의 정의를 넘어서 인간을 목적 그대로 대하는 것이다. 인간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금전적 이익을 불려 주는 도구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부엡은 정직이란 불의에 맞서고 거짓을 밝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정직만이 부조리와 비리로 멍든 채 좌초 중인 인간 사회를 건져 올릴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진실과 정직을 추구하는 것은 본래 인간의 본성입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자신이 늘 옳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 이것이 정직입니다. <논어>의 ‘학이(學而)편’ 에 나오는 “巧言令色鮮矣仁(교언영색선의인, 교묘한 말과 꾸민 얼굴에는 어짊이 적다)”이라는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 득세할 때 우리는 진실의 힘을 의심하게 됩니다. 정직이 올바른 삶의 길이며, 인간다운 사회를 이루는 첫걸음임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합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진실을 동경하고 추구하는 마음은 생존 욕구와 같이 기본적인 양심입니다. “자녀를 정직하게 기르는 것이 교육의 시작이다.”라는 서양의 격언처럼 ‘정직’은 삶의 원리이자 원칙입니다. 학교와 사회, 어른들과 부모는 아이들에게 정직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의 보살핌 아래 정직을 지지해 주는 문화 속에서 자란 아이는 자아존중감이 높습니다.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아이의 자존감을 강화하는 데 있습니다. 아이의 높은 자존감이 올바른 자아정체성과 꿈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어, 마침내 자아실현을 이루도록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양심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일 것입니다.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가장 강하고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정직은 거짓을 배격하고, 선을 지향하는 자신의 양심에서 비롯됩니다. 정직은 나와 타인에 대한 믿음이고 배려이자 용기입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삶을 선택하며 비리와 부패에 맞서는 용기가 이 사회를 바꾸는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말이 난무하는 사회에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고 때로는 거짓말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짓의 힘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짓을 이용하여 그 힘을 얻습니다. 그들로 인해 우리는 편이 나뉘어져 상대편을 불신하고 비방함으로써 집단적 위선을 가장합니다. 또한 양비론(兩非論)으로 진실에 눈감아버리지 않는지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진실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뢰와 행복은 인간관계의 정직에서 비롯됨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또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참된 용기임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자존감을 지키는 길이며, 자아실현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임을 우리 어른들은 몸소 보여주어야 합니다. 진실은 거울처럼, 정직한 양심에서 맑고 투명한 빛을 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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