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포근하다. 마당 서있는 매화나무가 금방이라도 하얀 꽃잎을 톡, 톡, 톡 터트릴 것 같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간간히 극성을 부리지만 봄은 벌써 나의 집 마당까지 온 것이다. 정월대보름날이다. 일 년 중 제일 큰 보름달이 하늘을 밝힐 것이다. 그 시간에 맞추어 함양읍 인당교 아래 위천변에는 달맞이 행사인 달집태우기가 벌어질 예정이다. 매번 정월대보름이 되면 발걸음이 그곳으로 옮겨진다. 함양으로 이사를 오고 처음으로 달집태우기를 구경했다. 그날의 화려한 풍경을 잊을 수가 없었다. 대보름달은 풍요의 상징이다. 그리고 불은 모든 액을 태워버리고 새로운 복을 가져다주는 정화의 상징이다. 풍요로운 새해, 질병도 근심도 없는 새해를 맞이하고픈 사람들의 소망이 ‘달집태우기’라는 놀이로 만들어진 것이다. 달집을 태워서 이것이 고루 잘 타오르면 그해는 풍년이, 불이 도중에 꺼지면 흉년이 들 것이라 점쳤다. 달집 속에는 대나무를 넣는다. 대나무가 불에 타면서 ‘탁탁 타닥’ 내는 소리에 마을의 악귀들이 달아난다고 여겼다. 고향에서는 달집태우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아이들에게 불이 허락된 유일한 날이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면 친구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마을 가까이 있는 논으로 모였다. 쥐불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빈 깡통에 불씨를 나누어 담고 그것을 빙빙빙 돌렸다. 신기하게도 불씨는 깡통 속을 벗어나지 않으며 붉은 원을 그렸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의 보름달이 논바닥으로 내려앉은 것 같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풍경이 몇 십 년이나 묵은 세월을 헤치고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달집태우기 하는 날은 불구경을 마음껏 할 수 있다. 세상에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불구경이다. 나는 불구경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남의 집에 불이 난 것을 구경하기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아궁이나 혹은 화목 난로 속에서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기 좋아하는 것이다. 불꽃을 가만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색깔이 보였다. 어떤 것은 아주 빨갛게, 어떤 것은 푸르게 또 어떤 것은 하얗게 타올랐다. 불꽃이 그렇게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특히나 빨간 잉걸불을 바라 볼 때는 가슴이 철렁거릴 만큼 아름다웠다. 이글이글 거리는 잔불만큼 많은 생각이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삶에서 만나야 했던 아픔과 슬픔, 그리고 기쁨과 희망 그 모든 것이 생태의 순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위천변에 도착하니 대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짚·솔가지·땔감 등으로 쌓아 커다란 움막형의 달집이 서있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중년의 아주머리가 달집 속으로 무엇을 집어넣는다. 합장을 하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달집을 태울 때, 가족들의 속옷이나 머리카락 혹은 손톱을 불사르면 액막이가 된다고 한다. 가족을 생각하는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진다.어찌된 일일까. 어둠이 내려도 달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달이 없는 가운데 사람들이 달집에 불을 지핀다. 천개의 눈이 그곳으로 모인다.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새해에는 나쁜 일은 모두 물러가고 좋은 일만 있게 해 주십시오” 나도 소원 하나를 달집에 얹는다. 물컹물컹 검은 연기가 하늘을 향해 몸부림을 친다. 그 모습이 승천하는 거대한 용 같다. 연기가 점점 묽어지고 붉은 불꽃이 허공을 향해 펄럭펄럭 춤을 춘다. 고향에서 쥐불놀이를 하던 그날처럼 환한 불꽃이 함양을 밝힌다. 소슬한 바람에 더 힘을 내며 하늘을 향해 붉은 머리를 날름거린다. 대나무가 탁, 탁, 타닥 유난히 큰 소리를 낸다. 불티들이 폭죽처럼 천지간에 흩어진다. 삶이란 저 달집처럼 화려하게 타올라 잉걸이 되고, 숯이 되고,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지는 것은 아닐까.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