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에 길은 우물물을 정화수라고 말한다. 선조들이 정성을 들이거나 약을 달이는데 주로 썼다고 한다. 아들손자가 태어나라고, 자손이 잘 되라고, 가산이 늘어나라고, 가족들이 건강하라고...... 집집의 할머니나 어머니의 온갖 소원들을 위해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 장독대에 떠놓고 두 손 모아 빌 때 쓰이던 물이 바로 정화수다. 외가가 있던 동네엔 우물이 울안에 있는 집이 별로 없었다. 우물이 있는 집에는 이웃의 다른 집에서도 물을 길어다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외가의 우물은 부엌의 뒷문을 통해 나가면 장독대 바로 옆에 있었다. 그 우물은 개나리 울타리 사이에 있어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모두 물을 길어 올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서 우물이 집안에 없는 이웃을 위한 배려로 그렇게 만드셨다고 하였다. 유난히 잠이 많은 내가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 할머니와 어머니의 정화수 기도를 본 적은 없지만 어머니로부터 좀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설날이나 추석날이 되면 어머니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마을의 다른 가정에서 우물물을 길어가기 전에 가장 먼저 물을 한 동이 떠서 그 물로 밥을 짓고, 탕국을 끓였다고 하셨다. 부정 탈까봐 정성을 들이는 것이라 하셨다. 물론 장을 담글 때도 이웃의 누군가가 물을 길어가기 전인 첫새벽에 물을 길어두었다가 그 물로 썼다고 하셨다. 우물 안 돌 틈 사이엔 이끼가 파랗게 자라고 있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외가의 우물은 검은색으로 보였지만 길어 올리면 맑고 시원하고 달았었다. 지금은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 만날 수 없는 우물이지만 쩡하고 첫새벽을 깨웠을 어머니의 두레박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물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 정성을 들여 음식을 해온 어머니의 마음을 전해 받는다. 집집마다 장을 담그는 계절이 돌아왔다. 장을 담그는 물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정보들이 있다. <규합총서>에는 장 담그는 물은 특별히 좋은 물을 골라 써야 장맛이 좋으니 비개인 후 우물물은 쓰지 말고 큰 시루에 독을 안치고 간수가 다 빠진 좋은 소금 한 말을 시루에 붓고 물은 큰 동이로 가득 되도록 부어 쓰라고 적혀 있다. 옛날에는 장 담그기에 좋은 물로 청명일과 곡우일의 강물, 가을에 내리는 이슬, 눈 녹은 납설수(臘雪水) 등을 들었다. 까다롭게 물을 골라 장을 담으면 장맛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서 옛사람들이 말하는 물을 찾아 장을 담그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물 보다는 오히려 메주가 장맛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 그러니 물 때문에 너무 고민하면서 장 담그기를 망설일 이유가 없다. 좋은 물이 있다면 좋겠지만 시중에서 판매하고 있는 생수도 좋고 수돗물이라도 괜찮다. 만약 수돗물을 받아 장을 담그고 싶다면 전날 저녁에 미리 받아 소독을 위해 쓴 염소의 냄새를 날리는 정도의 수고만으로도 장맛은 아주 훌륭하게 날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형편에 닿는 물로 장을 담근다. 강의 중에 장을 담그게 되면 그곳의 환경에 맞는 물을 받아 장을 담근다. 장이 1년 농사였던 시절에야 온갖 기원을 담아 장을 담가야 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발효를 과학으로 접근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으니 물 때문에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함양처럼 물 좋은 고장에서 장을 담글 때에는 더 좋은 물을 찾아 장을 담그려는 노력은 필요치 않으니 정월이 가기 전에 장을 담그기만 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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