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끓는 물에 슬쩍 데쳐서 고추장에 무친 고들빼기나물이 꼭 몇 번은 밥상에 올라왔었다. 그때마다 젓가락질을 해보았지만 늘 돌아오는 느낌은 맛있다가 아니고 너무 써서 먹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외가 근처에서 살다가 그곳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했어도 해마다 봄날의 어느 하루 밥상 풍경은 항상 비슷한 연출이 되었다. 할머니가 보내오시는 고들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할머니의 말씀은 한 결 같이 우리 가족의 건강을 배려한 것이었다. “봄에는 이렇게 고들빼기나 씀바귀처럼 쓴 나물을 먹어줘야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고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 거다. 그러니 써도 꼭 먹어라.” 돌아가실 때까지 한글을 모르셨던 할머니, 숫자도 모르셔서 버스번호를 그림으로 외웠다가 타시던 할머니시라 어릴 땐 할머니의 그 말씀을 흘려들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 것도 모르시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신뢰가 안 가서 흘려들었다는 말이 맞다. 나이가 들고 음식에 대한 취향이 바뀌기도 하였지만 식재료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할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고들빼기의 성질이 차므로 여름 더위를 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고들빼기의 쓴맛이 몸 안에 쌓인 노폐물을 빼주는 역할을 하므로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해석이 사실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고들빼기는 다른 채소와 달리 일 년에 두 번 채취해 먹는다. 김장 할 무렵 채취하고 남은 어린 것들이 겨울을 지내는 동안 굵고 실해져 봄이 되면 새싹을 올린다. 잎이 많이 퍼지기 전에, 잎으로 뿌리의 영양이 다 올라가기 전에 캐다가 나물로 먹는다. 몇 뿌리 남겨두면 꽃이 피고 씨가 떨어져 다시 자라니 가을에 그걸 채취해 김치를 담근다. 계절과 지역이 담긴 김치를 주제로 시식을 겸하는 강의가 있어 재래시장을 어슬렁거려 보기로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재래시장엔 그 지역의 농산물이 많이 나오게 마련이고 제철에 나오는 여러 가지 채소를 할머니들이 이고지고 나오시기 때문이다. 남원장에도 가보고 함양장에도 가보고 3일과 8일에 서는 옆 동네 인월장에도 갔었다. 거기서 고들빼기를 만났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손마디가 거친 할머니가 손수 캐서 들고 나오신 고들빼기를 몇 단 사가지고 왔다. 고들빼기는 잎과 뿌리가 만나는 지점이 검고 지저분하므로 과도를 들고 일일이 다듬어야 한다. 쓴맛이 너무 강하므로 소금물에 담가 삭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삭힌 고들빼기는 쓴맛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삭하니 염도가 높으므로 맹물에 몇 차례 씻어 소금기를 조금 빼서 김치를 담근다. 고들빼기김치는 다른 김치와는 달리 기다림이 필요한 김치다. 도시의 젊은 사람들이 먹을 김치라 일주일을 꼬박 삭히고 씻어 건져 전라도식의 고들빼기김치를 담기 위해 찹쌀풀에 진한 생멸치젓을 넣고 김치를 담갔다. 그리고 전라도김치의 마무리를 위해 검은깨를 듬뿍 넣었다. 눈은 연일 오고 춥다. 추운 겨울엔 따뜻한 성질을 지닌 수수나 팥을 찹쌀 한 줌과 함께 밥을 지으면 좋다. 오늘은 수수 한 줌 같이 넣고 밥을 짓는다. 막 지은 뜨거운 밥에 고들빼기 한 뿌리 올려 먹으면 삭혔으나 아직 남은 쌉싸레한 맛이 입맛을 절로 다시게 한다. 달빛 한껏 받고 인월(引月)에서 자란 고들빼기, 삭는 동안에도 달빛과 놀았는지 쓰지는 하나 달고 맛있다. 나이가 드는가 보다. 쓴맛이 입에서 달게 느껴지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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