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서원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09호이다. 1829년 경상도 유림들은 고은(孤隱) 이지활(李智活)의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1830년 서원을 창건하여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1832년에는 한남군 이어(李於)와 송계 이지번(李芝蕃)을 함께 추향하였다. 고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없어지고 말았다. 1914년 옛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1915년에 단을 설치하여 병풍을 치고 세분의 위패를 놓고 서원행사와 같이 석차례(釋茶禮)를 행했다. 1936년 향론에 따라 서원을 복원하였고 세 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해마다 3월 중정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낸다고 한다. 송호서원은 병곡면사무소 옆에 위치해 있다.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대문의 태극문양이 커다랗게 눈에 들어왔다. 찾기가 쉬웠다. 하지만 여러 번 서원의 정용문(整容門) 앞에 서보았지만 한 번도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갈 때 마다 대문은 굳게 닫쳐 있었다. 혹시나 마을 어르신 어느 분이라도 만나지 않을까 싶어 한참 동안 주위를 서성거려도 보았다. 이상하게도 서원 앞에 서 있는 동안에 아무도 그곳을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나는 인연이라 부르고 싶다. 아직 서원과 내가 만날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코스모스 한창인 어느 날도 정용문은 열려있지 않았다. 무연히 왼쪽에 있는 돌담으로 가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꼭꼭 문을 잠그고 속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서원이 속을 살포시 드러내고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유허비(遺墟碑)가 보였다. 집의제(集義齋)와 거경제(居敬齋)가 동서로 지어졌고 중앙에는 강당이 지어졌다. 강당 뒤에는 사당 출입문인 승사문(承事門)이 보였고 위패를 모신 경앙사(景仰祠)가 보였다. 6동의 목조건물이 빛바랜 기와를 머리에 이고 가을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바람과 햇볕 속에 흙속의 흙처럼, 거미줄 속의 거미줄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존재하는 듯 했다. 돌담을 돌아 다시 망월정(望月亭) 충절시(忠節詩) 비(碑) 앞에 섰다. 돌 속에는 고은 선생의 아픔과 슬픔이 새겨져 있었다.    밤마다 이슥토록 임금님을 생각하니   동녘에서 뜬 달이 임과 나를 비추네  가슴에 맺힌 원한 풀어줄 사람 없어  외로이 산정에 기대어 눈물만 흘리네.   이지활 선생의 자는 망기(忘紀), 호는 고은,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사미시에 합격한 후 우봉현감이 되었으나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뺏기고 영월로 유배를 당하자 벼슬을 버렸다. 그 후 거창 가조 박유산에 은거하면 사셨다. 단종을 그리는 애절한 시를 읊으며 지내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산정이 올라가 술을 마시며 통곡하다 세상을 달리하셨다. 흔히들 한평생 살아가는 것이 ‘눈 깜짝할 사이’라고 말한다. 그 눈 깜짝할 사이에는 기습적인 균열이 있기 마련이다. 균열이라는 것은 인생사를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도록 두지 않는다. 그리고 변화를 불러온다. 사람들의 힘으로 도저히 변화를 막을 수 없을 때도 있다. 고은 선생도 시대의 변화를 막지 못했다. 단종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며 생을 마감했다. 삶이라는 것은 변하기 때문에 힘들다. 변하기 때문에 아프다. 하지만 어떻게든 변화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변화를 받아들이며, 멍든 가슴을 삭히는 법을 배워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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