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오솔길 하나뿐이었다. 채완은 그 길을 눈 감고도 갈 수 있었다. 뽀드득 뽀드득 조심스레 눈을 밟으며 암자를 나섰다. 그런데 한참을 왔는데도 마을이 보이지 않았다. 매일매일 학교 가던 길인데 영 낯설었다. “뿌지직”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렸다. ‘혹시 곰?’ 오래전에 들은 스님 말씀이 생각났다. “지리산은 숲이 깊어 곰이 살고 있단다. 그러니 밤늦도록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았다.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기다 돌부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몸이 공처럼 떼굴떼굴 굴렀다. 가까스로 나무를 붙잡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발목이 아파 일어날 수 없었다. ‘곰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지?’ 무서운 생각에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갈퀴 같은 바람이 채완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상하게도 스님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도솔암에서 진돌이와 뛰어놀던 일들이 먼 옛날의 일같이 생각되었다. 도솔암이 그리웠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곰이 무서워 소리 내 울 수도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요한 숲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채완아~.” 스님 목소리였다. “스님! 여기요~.” 혹시나 스님이 못 들었을까봐 큰소리로 대답하고 또 대답했다. 하얀 불빛이 다가왔다. 스님의 모습이 보였다. 채완은 스님이 정말 반가웠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엉엉 소리 내 울었다. “누가 죽기라도 했느냐?” 스님은 퉁명스런 소리를 냈다. 스님의 눈동자도 빨갛게 변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채완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요 녀석, 멀리도 못 갈 거면서······. 자 업혀라.” 스님의 등은 따뜻했다. 오래전 엄마의 따뜻한 등 같았다 두 사람의 머리위로 꽃송이 같은 함박눈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드디어 스님과 약속한 날이 되었다. 법당에는 불화가 펼쳐져 있었다. 같은 것을 두 번 그리니 훨씬 쉬웠다. 그래서 열흘 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그때 암자에서 불화를 배우는 아저씨가 속삭였다. “후다닥 그렸다고 꾸중하시겠지.” “그래도 어린애치고는 제법 그렸는걸.” 스님이 입을 열었다. “잘 그렸구나. 고생 많았다.” 스님의 입에서 처음으로 칭찬의 말이 나왔다. 모두 깜짝 놀랐다. 아무도 금어가 될 재주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불화 그림을 제일 잘 그리는 사람을 금어(金魚)라 한다. 너는 금어가 될 재주를 가졌다. 하지만 재주가 있어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열심히 하거라.” ‘금어? 내가 금어가 될 수 있다니······.’ 채완의 가슴에서 “둥, 둥, 둥” 큰북소리가 났다. 관음보살님을 쳐다보았다. 보살님도 빙그레 웃는 듯 했다. 그 모습이 엄마의 얼굴을 닮았다. 스님은 채완이가 도솔암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석가모니가 부처님이 되기 전에 중생을 이끈 곳이 도솔천이라 했다. 부처님처럼 채완이가 도솔암에 머물러야 금어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채완이를 도솔암에 맡겼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법당 처마 밑에 걸린 풍경을 때린다. “땡그랑······” 풍경소리가 숲의 고요를 깨트린다. 채완이가 법당에서 나온다. 땀 때문인지 얼굴에 빛이 난다. 그리움이 아픔이 되고, 그 아픔이 채완이를 더 어른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진돌이 눈에 채완이가 제법 의젓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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