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소통’이란 단어가 사회적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고 신문과 방송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쓰기는 똑같이 쓰지만 이 단어의 뜻은 각각 자신이 처한 입장과 지향점에 따라 전혀 판이하게 사용하며 해석된다는 것이다. 결혼 성수기를 맞이해 최근 결혼식을 자주 가게 된다. 30.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례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불멸의 레퍼토리가 있다. 부부 일심동체. 즉 사랑으로 둘이 하나가 되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많은 사람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관습화된 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이라고. 그러면 하나란 과연 무엇일까. ‘하나’ 는 Unity 혹은 ‘United’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 는 바로 연합을 의미한다. 둘이 아닌 하나는 한 마음. 한 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각과 정신까지 모두 포함한 연합이자 하나를 의미한다. 하지만. 나와 다른 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성격도 취향도 식성도 다르다. 학교에 다니며 친구를 만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다른 점은 더욱 커지게 된다. 더군다나 요즘같이 개성을 필수 아이템으로 강요받는 시대에선 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 다른 그와 내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하나가 되기 위해 결국 나를 버렸던 것 같다. 사실. 남자들보다 우리 세대의 많은 여자들은 그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그 미덕에 강요당하면서. 아니 강요당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자신을 버렸다. 자신을 버리고 얻은 부부 일심동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그건 결코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와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둘 사이에 진정한 소통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소통이란 적어도 두 사람이 가치관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며 인식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전제를 서로 인정해 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소통이란 그 현격하게 겉으로 드러난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이질감을 이해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둘 중 하나가 자신을 버리든지. 아니면 소모적인 다툼의 연속으로 인생을 채우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것이다. 1998년 시작부터 방영되었던 한 때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한 드라마가 있다. 주인공인 네 명의 여성 뉴요커들의 삶의 패턴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 문화의 대표적 아이콘이라는 이 드라마에서 나는 그들이 사랑에 대한 인식과 결혼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많은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드라마에서 표현된 그들의 관심은 일심동체라기보다는 서로 이해하는 즉. 우리가 사는 세대의 사회적인 큰 문제인 소통의 문제를 드러내려고 하였던 것 같다. 드라마에서의 그들의 삶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화해하고 헤어졌다 다시 만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과정에서의 서로간의 소통과정이 너무나 당당하고 자유롭다는 것. 그것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두 사람의 완벽한 일치가 아니라 완벽한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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