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한권의 경전이 있는데그것이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작자미상의 선시)  어스름이 내리는 시각 길을 나섰다. 차창 밖으로는 거친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쉼표 없이 떨어졌다. 빨갛게 익어가던 사과는 가지를 악착같이 붙들고 있고 들판의 누른 벼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모두들 시련의 시간을 잘 견디고 있는 듯이 보였다. 한참을 달렸을까. 커다란 누각이 눈에 들어왔다. 안의 읍에 있는 광풍루(경남유형문화재 제92호)였다. 바람은 누각에 부딪치며 짧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거친 바람도 마음대로 흔들지 못하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차를 세우고 잠시 숨을 골랐다. 자주 이곳을 지나치지만 광풍루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비바람 덕분에 자세히 볼 여유가 생긴 셈이었다. 광풍이란 ‘비가 갠 뒤에 맑은 햇살과 함께 부는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을 이르는 말이다. 소나무에 바람에 불면 솔향기가 나고 꽃나무에 바람이 불면 꽃향기가 난다. 그럼 광풍루에 부는 바람은 어떤 향기가 날까. 조선시대 누각은 양반의 전유물이었다. 이 누각에는 많은 양반이 올랐을 것이다. 제일 먼저 안의 현감을 지냈던 연암 박지원 선생(燕巖 朴趾源. 1737∼1805년)이 떠올랐다. 선생은 조선후기 사람으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 하였던 실학자이며 소설가였다. 나는 선생이 쓴 <열하일기>를 좋아한다. 열하일기는 청나라의 신문물을 소개하는 동시에 배워야 할 점을 논하였다. 또한 기묘한 문장력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당시의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배청론(排淸論)이 팽배하였기에 그의 책은 큰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생생하고 자세한 여행기록과 재치 있는 문체와 새로운 의견을 서술하였기에 재야에서 즐겨 읽혀졌다고 한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말하여 지고 있다. 연암선생은 안의현감으로 재직할 때 옥사를 관대하게 처리하였으며 백성의 구휼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들기 위해 고민했던 분이었다. 1780년 사신 일행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중국의 수차를 본떠 물레방아를 만들었다. 한 사람이 열사람의 몫을 해 낼 수 있는 기구였다. 또한 베틀. 풍구. 양수기 등의 농기구를 실용화 하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다. 누각 밑에 서서 기둥을 만져 보았다. 오래전 이곳을 스쳐갔을 연암 선생의 손길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은 떠났어도 물건은 오래 남아 지금 사람의 마음에 아련함을 채워주는 모양이다. 시나브로 비가 가늘어 지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광풍루에 부는 바람 속에는 맑음과 고즈넉함과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따스한 향기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울컥 거렸다. 알 수 없는 감정은 어디서 온 것일까. 향기 중에서 가장 멀리 가는 것이 사람의 향기라고 흔히 이야기한다.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겨지는 것 또한 사람의 향기이다. 그것은 거리도. 시간도 단번에 뛰어넘는다. 안의 광풍루는 백성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던 연암 선생의 향기를 품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며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내가 쓴 글을 읽고 한 사람이라도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 하지만 가끔은 글쓰기가 힘들고 싫증이 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광풍루를 찾고 싶다. 목적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백성을 위해 노력했던 연암 선생의 삶을 경전처럼 펼쳐 보고 싶다. 그리하여 나 또한 선생의 삶을 배워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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