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한창 무르익을 무렵 수동면 원평리를 지나는 길이었다. 따가운 햇볕 속에 홍살문이 보였고 솟을삼문이 보였다. 청계서원(靑溪書院.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6호)이었다. 처음에는 햇살이 너무 뜨거워 홍살문과 솟을삼문을 외면했다. 하지만 멀리가지 못했다. 그곳에 마음이 붙들려 버렸던 것일까. 어느새 간 길만큼 다시 돌아와 청계서원 앞에 서 있었다. 문턱을 넘어 서원 안으로 발을 디뎠다. 마당에는 풀과 봄꽃들로 무성했다. 양지꽃과 제비꽃이 고만고만하게 엎드려 있고. 자운영이 고개를 꼿꼿이 들고 바람에 하늘거렸다. 서원의 왼쪽에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구경재(久敬齋)가 자리 했고 오른쪽에는 역가재(亦可齋)가 자리했다. 정면 축담위에는 아담한 강당이 보였다. 그리고 강당을 호위하듯 허리 뻗은 향나무와 허리 굽은 노송이 푸르게 서서 나를 맞았다. 청계서원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듯 했다. 꽃과 나무와 나비들이 서원을 지키고 있었던 것일까.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나비 그리고 앵앵 소리를 내며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땡벌은 오래전부터 그러했던 모습처럼 하나의 정물 같았다. 그 곳에서 나도 시나브로 정물이 되어갔다. 어디선가 참새 한 마리 포르르 날아오르며 정물이 되었던 나를 깨웠던 모양이다. 나는 다시 숨을 쉬며 꽃들을 밟지 않기 위해 사뿐사뿐 서원을 거닐었다. 작은 연못을 보았고 탁영 선생 유허비(濯纓 金先生 遺墟碑)를 보았고 돌담 너머 하늘을 보았다. 강당을 돌아 높은 지대 위에 있는 청계사(靑溪祠) 앞에 섰다. 이곳은 조선 성종 때 사람파를 대표하던 학자 김일손(金馹孫:1464∼1498)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향사(享祀)를 지내는 곳이다. 선생의 호(號)는 ‘탁영’이며 ‘갓 끈을 씻는다’는 의미다.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시구(詩句)로서 “창량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을 것이요. 창량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것이다.” 세상이 맑으면 갓을 쓰고 사회에 기여할 것이고. 세상이 탁하면 발을 씻고 세속을 떠날 것이라는 뜻이다. 선생은 성종 17년 갓을 쓰고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과거에 급제했다.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사초(史草)에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였다. 그리고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었다. 진나라 말 숙부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이 글은 중국의 사례를 들어 세조가 왕위찬탈을 위해 단종을 시해한 사건을 비난한 것이다. 그것은 세조의 집권을 돕고. 그 그늘에서 크게 권력을 차지한 훈구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실록의 편집이 끝나면 세초(洗草. 실록 편찬이 완료된 뒤 사초를 없애는 일)를 하여 비밀리에 부쳐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사초가 훈구파 이극돈의 손에 들어갔다. 이극돈은 자신의 비리를 지워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선생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극돈은 유자광을 만나 정치공작을 펴 마침내 연산군의 귀에까지 조의제문(弔義帝文) 이야기가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연산군은 “사초를 올리게 하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다. 결국 훈구파와 사림파의 힘겨루기인 정치적 참극.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훈구파의 음모로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스승 김종직 선생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 당시 선생의 나이 삼십 오세였다. 탁한 물에 발을 씻지 않고 갓 끈을 씻어서 일까. 하지만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후대까지 당신의 이름은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있다. 아마 그것은 어떤 어려움에도 꺾이지 않았던 직필(直筆)의 정신을 행동으로 실천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행동에 부끄럼이 없어야 가능하다.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수필가를 알고부터는 수필은 절대 안 읽어. 글은 참 아름다운데 그 사람의 행동은······.” 글과 행동이 너무 다르다고 했다. ‘글과 행동이 다른 다’는 것은 하나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기에 순간적인 감동은 줄 수 있어도 기억 속에 오래 남지 않는다. 나는 글을 쓰면서 살아가기를 꿈꾸는 사람이다. 그리고 글속의 나와 글 밖의 내가 같은 모습이기를 기도한다. 사람들에게서 ‘글과 사람이 닮았구나’ 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행동을 돌아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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