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읍 운림리 보림사(寶林寺)에 미륵전(彌勒殿)이 있다고 한다. 그곳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모셔져 있을 것이다. 미륵은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가 될 보살이다. 경남 지역에는 미륵보살상이 흔하지 않다. 그래서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하며 절집으로 향한다. 전각 앞에 안내문이 보인다. ‘용산사지(龍山寺址)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立像.경상남도 유형문화재318호)’라 적혀 있다. 미륵보살이 아니라 여래라니. 문을 열고 들어서니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돌부처가 눈이 들어온다. 상호(相好)는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마모가 심하다. 두상에 비해 어깨가 좁고. 비대한 체구에 비해 키는 작다. 그리고 머리에는 미륵보살의 상징인 관이 없다. 손을 바라보니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은 보이지 않고 중지와 약지를 구부렸는데 무엇을 잡고 있는 모습이고. 왼손의 손가락은 편 채 가슴까지 들어 올리고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성취한 정각(正覺)을. 지신(地神)이 증명하였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손 모양을 지닌 채 홀로 서 있는 것을 보니 석가모니불이다. 그리고 항마촉지인은 주로 앉아 있는 불상에서 나타나며 서 있는 불상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유례가 흔하지 않은 형식이다. 만약 상호만 온전했다면 문화재로서 더 가치를 인정받았지 모른다. 바라보고 있는 석조여래는 오래전부터 미륵보살로 불렸기에 미륵전에 모셨을 것이다. 명호(名號)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단지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영험을 나타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미륵전에 들어섰을 때 선한 눈매에 해학적인 미소를 짓는 듯 보였다. 그리고 나의 양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기분이 좋아졌다. 왜 그렇게 보였을까. 다시 바라보니 눈. 코. 입 어느 하나도 없다. 흔히 부처님의 상호는 원만(圓滿)하다고 알고 있다. 아주 잘 생겨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환희심이 일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못생긴 얼굴의 부처님을 더 좋아한다. 그것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오고 정겹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문득 문득 떠오르는 정겨운 얼굴 하나가 있다. 함께 단청을 배운 친구다. 나에게 단청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은 단청장이 되어 문화재청에 인간문화재로 이름을 올렸다. 은사님이 친구를 보며 “어느 깊은 산속 오래된 절집에 그려져 있는 벽화속의 여인을 닮았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벽화를 바라보며 느꼈던 설명되지 않던 편안함이 아련히 살아난다고 했다. 참으로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친구의 얼굴은 동굴 납작했으며. 눈은 쌍꺼풀 없이 작았고. 콧대 또한 낮았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미운얼굴이었다. 하지만 항상 웃으며 긍정적인 말을 하였기에 모두들 그녀를 좋아했다. 채근담에 이런 구절이 있다. ‘꽃은 향기가 생명이며 사람은 덕(德)이 생명이다.’ 또 법구경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꽃 항기는 바람을 거슬러 가지 않지만 착한 이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모든 방향에 두루 퍼진다.’ 덕은 바로 사람의 향기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덕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이야기를 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덕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물론 헤어지고도 한참동안 기분을 좋게 한다. 그럼 못생긴 그 친구의 말과 행동에 덕이 있었던 것일까. 향을 사르고 삼배를 올린다. 향 내음이 폐부 깊숙이 들어온다. 먼 골짜기에서 뻐꾹새가 울음을 운다. 뻐꾹. 뻐꾹 소리에 절집의 풍경이 뎅그렁 뎅그렁 장단을 맞춘다. 마음이 편안하다. 편안하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항마촉지인!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증표가 유독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부처님이 마음을 돌아보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나를 바라보면 마냥 편안하듯이 너도 누군가에게 그런 편안함을 준 적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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