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징의 역사는 대한민국 징의 역사이며 복원해야 할 우리의 중요한 유산입니다” 서상면과 서하면의 경계지점 일명 꽃뿌리. 이곳에는 함양징터라는 기념비만이 쓸쓸히 서 있다. 비석의 아랫 기단 부분에는 징의 모습이 비석을 받치고 있으며 양면에는 함양징터의 역사와 유래 등에 대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잊고 있었던 함양징(꽃뿌리징.안의징)의 역사를 되새기기 위해 징장 전수조교 이점식(56.대봉전통공예)씨를 만났다. 그는 현재 함양징의 혼이 살아있는 꽃뿌리에 공방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징의 시조는 함양이다. 구전이지만 통일신라시대 시원선생이 용추사 인근 유동마을에서 부인과 함께 지하 토굴에서 징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징을 만드는 사람들은 시원선생을 기리기 위해 1년데 두번 재를 지낸다”고 설명했다. 이곳 꽃뿌리를 비롯해 함양군 일대에는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10여곳의 징점(공방)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는 30여곳의 징점이 서상면. 서하면. 안의면 등에 흩어져 있었다. 가히 우리나라 징의 산실이었던 곳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무기 제조를 위한 유기 공출이 시작되면서 그 숫자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함양징의 역사는 장인들에 의해 이어져 왔다. 함양과 김천 등에 함양징을 배운 이들의 공방이 곳곳에 산재했었다. 함양징의 시련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면서 놀이문화로 대변되는 풍악을 일체 금지하면서 징의 수요가 없어지게 된다. 징을 팔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징점들 또한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이와 더불어 이곳 꽃부리 인근의 징점들은 그 이전 기계화로 인해 사자리게 됐다. 힘든 작업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장인들의 일감이 없어졌고. 이후 세월이 흘러 징 장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징의 계보가 끊기는 듯 했다. 함양징을 알기 위해서는 꽃뿌리에 징점을 만들며 징의 계보를 이어온 고 오덕수 선생에 대해 알아야 한다. 징의 명인이었던 오덕수씨는 1947년 이곳에 징점을 짓고 30여년을 오직 함양 방짜징의 제작과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다 1978년 작고했다. 이를 이어받은 분이 이점식씨의 부친인 이용구 징장. 이용구 징장은 경남 무형문화재 제14호 징장으로 지정됐으며 그의 계보는 장남 이점식 장인에 의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징장 이용구 옹으로부터 독립한 이점식 장인은 중학교를 졸업하던 74년부터 매질을 배워 올해로 꼭 40년째 방짜유기에 혼을 집어넣어 징의 소리를 만들고 있다. 예로부터 함양징의 울림을 최고로 쳤다. 징의 울림은 황소울음 열두고개를 넘어가야만 좋은 소리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물놀이로 인해 다른 음과 조화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강하고 짧게 나야 소리가 좋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소리를 불어 넣는 것. 울음을 잡는 것. 소리가 뭉치면 풀어주고 2.000번의 손길이 가야만 만들어지는 것이 징이다”라고 설명했다. 징의 주 재료는 구리와 주석이 78:22로 된 합금이다. 이렇게 배합된 합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쇠를 불에 달구어 가며 두드려서 만든 그릇을 말한다. 예전 쇠를 녹일 때 금과 은을 넣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고가로 넣을 수 없다. 방짜유기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지만 소리를 불어 넣는 작업은 아무나 하지 못하는 최고 등급의 작업이다. 이점식씨는 “방짜유기의 고수가 징이다. 세숫대야에 혼을 불어 넣으면 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징에 생명을 불어넣는 소리를 잡는 작업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예부터 징을 만드는 사람은 양푼이나 세숫대야를 만들 수 있지만 양푼이나 세숫대야를 만드는 사람은 징을 만들 수 없고 그 기술이 얼마나 배우기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힘이 들고 기술습득기간이 긴 우리 고유의 것을 요즘 젊은이들이 배우려고도 하지 않지만 자식들 외는 널리 전수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현실이 안타까운 심정뿐이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문화재청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심사를 앞두고 있다. 방짜유기로 신청을 했지만 그의 최종 목적은 함양징의 소리를 잇기 위한 것이다. 그와 함께 함양징의 혼이 깃든 꽃뿌리 인근에 공방을 만들 계획도 구상중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천상 장인인 이점식씨 혼자하기에는 벅찬 일일 수밖에 없다. 그는 “함양징을 함양에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곳 꽃뿌리에 함양 징의 역사를 다시 세우고 교육의 장이자 역사 현장의 장으로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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