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기 전 그리고 잠들기 전 매일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휴대전화 속 문자를 확인하고 댓글을 달고 인사를 하는 것이다. 꼭 아침과 저녁뿐 아니라 틈틈이 새 메시지를 확인하곤 한다. 이렇게 휴대전화를 자주 들여다보게 된 것은 카톡이나 밴드. 카스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며칠 전 초등학교동창회가 있었다. 처음 동창회가 시작되었을 때는 갈 건지 말 건지 맘속으로 갈등도 많았다. 옛 추억을 찾으려 해도 도무지 기억나는 일이라곤 없다. 내가 기억하는 친구들은 동창회랑은 담을 쌓고 사는지 모습은 제쳐두더라도 그 소식조차 들을 수 없다.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나를 찾아주는 친구도 없을뿐더러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억 못하는 그런 일들이 내가 다니던 동시간대에 같은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이라 믿고 보면 실감이 나고 추억을 공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동창생을 만나면 어린 시절의 그때로 돌아가 말과 행동도 덜 자란 어린 내가 된다. 근심걱정 없고 순수했던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는 것도 그 기분을 맛보기 위함이다. 중년을 맞은 친구들은 배가 나오고 머리는 희거나 벗겨진 모습이지만 짓궂은 말을 던지는 그 얼굴에는 어린 시절 천진했던 웃음이 녹아 있다. 욕지거리를 해도 정겹다. 한 해 두 해 회를 거듭할수록 또 다른 추억을 공유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난다. 만나면 좋은 친구들. 헤어지기 아쉬워서 밤새워 이야기꽃을 피운다. 함께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이 들어가는 일이 그리 서글픈 일만은 아님을 느낀다. 앞으로 동창회에 더 많은 친구들이 와 줬으면 하면 바램이다. 이 고장에 살지만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다. 저마다 나름의 사정이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몇 시간씩 차를 타고 달려와 주는 객지의 친구들을 봐서라도 참석해 주길 바란다. 내가 동창회를 가는 이유는 떠들썩한 이벤트나 노래방 문화를 즐기자고 가는 것이 아니다. 젊은 날을 보내고 나이 들어가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나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면서 삶의 기쁨을 맛본다. 몇 해 전 인기가수 J의 콘서트를 보았을 때 그가 한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는 특유의 더벅머리에 변함없는 짙은 색안경을 끼고 있었고 전날 입었던 흰 셔츠 그대로의 모습에 미남은 아니다. 담백하게 노래를 시작하자 그의 모습이 무색하게 목소리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제 나이가 몇 살로 보이나요? 난 50을 넘겼어요. 그런데 50이 넘으면 어떠할까요? 그 때는 또 그 때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이 좋아요. 여러분도 그 때가 되면 나의 말이 이해가 될 겁니다” 그 때 나는 30대 후반이었고 십여년의 시간은 꽤 길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50에 이르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때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은 노래보다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했던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얼마 전 ‘불후의 명곡’이라는 TV프로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아직까지 건재한 것의 그의 노래와 그의 말이 갖고 있는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회한이나 미련이 아니라 경험한 만큼 가슴으로 알게 되는 것은 세월을 따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연애를 하는 젊은이는 말할 것이다. 모든 사랑노래는 다 내 얘기 같다고. 이별을 하면 모든 이별노래는 다 내 마음 같다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하는 말도 다 같은 맥락이리라. ‘통과의례(通過儀禮)’ 출생. 삼칠일. 백일. 첫돌. 관례. 혼례. 회갑. 희년. 회혼. 상례. 제례 등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생을 마칠 때까지 몇 고비의 규범화 된 의식-을 거치는 동안 인생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희로애락(喜怒哀樂)’ 녹아있다. 인생의 반을 살아내고 남은 통과의례를 잘 치러야 할 것이다. 내 나이 50이 되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중 또 무엇이 있을지 기대해 본다. 나와 같은 통과의례를 남겨두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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