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때쯤 ‘5月 입니多’라는 같은 제목으로 글을 실은 적이 있었다. 5월에는 여러 가지 행사들이 많다는 뜻으로 많을 다(多)자를 넣어서 ‘5月 입니多’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주간함양에 기고를 했었다. 그런데 꼭 1년이 지나서 이번 글 제목도 같은 제목으로 잡은 것은 5월을 보내면서 되돌아보아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필자는 금년 들어서 지리산 목회를 시작한지 11년을 맞았다. 지리산 자락에 대한 첫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이리저리 겅둥겅둥 바쁘게 뛰어다니기는 했다. 돌이켜 보면 아쉬움과 후회만 가득하다. 필자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기 전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대학 때부터 즐겨했던 연극에 몰두하고 있었다. 필자의 고향인 경기도 김포에 최초의 극단 ‘방앗간’을 만든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렇게 연극에 빠져서 살다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등지고 목회 길에 접어들었던 필자는 그야말로 세상과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에 내 속에 간직하고 있던 ‘끼’를 어찌하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김시라씨가 쓴 모노드라마 ‘품바’를 다시 꺼내들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노인복지시설이나 장애인복지시설 등을 찾아다니면서 봉사를 목적으로 공연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여기 저기 노인대학이나 경로잔치. 체육대회 등에 초청을 받기 시작했다. 목사라는 이유로 교회에서도 필자를 부르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작은 시골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특별하게 교회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특기)를 묻어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관객들의 환호와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목사로서의 처신도 중요했기 때문에 격조 높은 각설이 공연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사람들은 목사라는 신분 때문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마치 그것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전국을 누비며 공연 횟수를 늘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끼’는 주체할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대전 보훈병원에 공연하러 갔다가 경기민요를 부르시는 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욕심(?)이 많은 나는 되지도 않는 목소리에 경기민요를 해 보겠다고 달려들었다. 대부분의 민요들이 그렇지만 현대적인 감각 보다는 전통적인 가락을 재생해 내야 하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한동안 차를 타고 다닐 때마다 경기민요 CD를 반복해서 듣고 다녔다. 차 안에서야 얼마든지 크게 떠들고 따라 불러도 상관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동을 걸다가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경기 민요 소리에 어리둥절해 하는 교인들을 보면서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필자는 옛날부터 어르신들을 너무나 좋아했고. 옛 가락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필자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필자는 경기도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경기민요는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처럼 느껴졌다. 노랫가락이 구성지게 꺾어질 때마다 떠나온 고향과 두고 온 어머니. 일찍 떠나가신 선친(先親) 생각에 혼절할 정도로 깊이 몰입하게 되었다. ‘아리랑’은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민요가 아니던가? 특히 권효가(勸孝歌)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효를 권하는 노래이니 좋고. 어르신들께는 사뭇 공감이 가는 가사로 이어지니 더더욱 좋은 민요다. 더구나 우리 가락을 살리고 보존하는 일은 목사가 아니라 세상없는 관직에 있는 사람이라도 나쁘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논리를 가지고서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거침없이 경기민요를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는 의령군 낙서면 면민체육대회 및 경로잔치에 게스트로 참가하게 되었다. 멀기는 얼마나 먼지. 그러나 불러주는 것만 해도 감사한 판에 이런 것 저런 것 따질 내가 아니었다. 시골 목사 주제에 그럴 듯한 한복에 도포자락을 입을 수도 없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사천 서포까지 쫓아가서 허름한 시골 한복집에 걸려있던 상복을 얻어 입고서. 품바 공연에 이어서 ‘권효가’ 첫 번째 무대를 멋지게 마무리했다. 바지는 짧아서 껑충하고 포플린 소재로 만든 싸구려 상복을 입었지만. 뭐가 그리 좋았는지 필자는 기쁨이 가득한 5월을 마음껏 뛰어다녔다. 지리산 자락의 시골 교회를 목회하면서 육신은 젖은 솜처럼 무겁고 나른해도. 덩실 덩실 춤출 수 있어서 나는 좋았다. ‘꿈도 많고. 욕심도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겠다.’는 아내의 핀잔을 흘려들으면서 새로운 것에 또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 나는 정말 ‘5月 입니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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