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은 함양인들의 안식처요 정신의 요람이다. 함양인들의 정신이 대관림 그 푸르름과 항상 같을 수 있다면 위천수의 흐름처럼 함양의 발전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림은 울고만 있는 것 같다. 최근의 함양의 모습은 엄청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전현직 군수 세 분의 연이은 불명예. 풀뿌리 민주주의의 표본인 군의회 의장의 불미스런 신문보도. 4·24재보궐선거마저도 시원스럽지 못한 방송보도 등. 메시아가 강림하더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작가 게오르규가 말한 25시적 상황은 아닐까 한다. 상림에 모셔진 열한분의 선현들도 지하에서 통탄하고 있을 것이다. 위민애향의 고고한 정신. 의(義)를 숭상하는 성리사상으로 후진양성에 혼신을 다한 큰 어른들이 아닌가. 그분들로부터 비롯된 이른바 상림의 정신. 곧 함양인의 정통성은 크게 훼손되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다볕골 함양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자긍심마저 잃게 된 치욕적인 현상이라고 출향인사들은 탄식하고 있다. “쿠오바데스 함양이여!” 라고 외쳐본다. 신이여! 선비의 고장 함양은 어디로 가야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함양인들은 저마다의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의 언덕이 아닌 천왕봉 상상봉으로 가서 선비정신 되새겨 도덕성 회복을 위한 구원의 손길을 펼쳐야 할 것이라고 꾸짖는 것 같다. 그 구원의 메시지는 인(仁). 의(義)를 본위로 하였던 옛 선비들의 삶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남을 배려하고 웃어른 공경하는 인간애가 풍만하였고. 자기의 허물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을 자기 생활의 으뜸으로 하였다. 이중에서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오늘날 물질 사회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독일의 철인 헤겔의 주장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자유역사는 악(惡)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여기에서 악은 악한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악(惡)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악이 되는가를 알 수 있어야 악을 멈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장 함양의 주민들도 수오지심을 갖게 되는 자기성찰의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선거 때가 되면 뒤숭숭한 이야기들 그것이 악이 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악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이른바 악순환의 함양사태를 가져온 것이다. 멸치 한 포대. 얇은 돈 봉투 하나. 소주 한잔의 접대에 귀중한 자존심을 팔게 되는 싸구려 인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을 교훈으로 삼아서 다가오는 6·4 농협조합장보궐선거에는 선거의 먹구름 지역이란 오명을 씻게 하자. 그 지역의 발전은 그 지역 주민들의 의식수준과 비례하고 있음을 깨달아서 성숙된 도덕적인 생활을 통해 선진형 시민의식을 갖는 함양인들이 될 때 상림의 통곡은 멈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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