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두 정여창 고택(一蠹 鄭汝昌 古宅)정여창 선생님 계절의 여왕인 오월입니다. 담장 밑에는 붓꽃이 막 보랏빛의 꽃망울을 터트렸으며. 민들레가 바람에 홀씨를 날리고 있습니다. 저는 산들바람을 따라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는 선생님의 생가(중요민속자료 제186호)를 찾아왔습니다. 뙤약볕 내리는 곳에 파란 잔디가 펼쳐져 있고 ‘일두 정여창 고택 홍보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담장을 따라 간 곳에 솟을 대문을 만났습니다. 대문에는 나라에서 내린 충효정려(忠孝旌閭) 패가 다섯 개나 걸려있었습니다. 활짝 열려진 대문 안에는 오래된 풍경이 보였습니다. 저는 조심스레 발을 옮기며 오래된 풍경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높은 축대위에 검은 기와를 머리에 이고 은은한 고풍을 품은 사랑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랑채를 마주한 담장 밑에는 집터에 딸린 산처럼 여러 가지 나무와 꽃을 심어 석가산을 꾸며 놓았습니다. 사랑채 방문 위에 커다란 글씨로‘충효절의(忠孝節義)라 쓰여 있고 누각에는 탁청재(濯淸齋)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있었습니다. 탁청은 ‘세속의 혼탁한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뜻 입니다. 즉 ‘수양을 통해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그 뜻을 헤아리고 있을 때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들이 누각의 대청을 청소하고 있더군요. 함양문화원에서 ‘같이 공유하는 함양 문화재의 가치(價値)’라는 현수막을 걸고 ‘전통 곰취부각 만들기’ 체험을 했던 모양입니다. 청소를 마친 아이들은 잘 닦여진 누각의 대청에 앉아 그날의 체험을 그림으로 그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엇을 그리나 싶어 하얀 도화지 속을 엿보았습니다. 크레파스로 쓱쓱 사람을 그리기 시작하더군요. 올망졸망한 아이들의 모습······. 선생님도 혹시 하늘에서 천진스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셨나요? 저는 선생님의 눈길을 상상하며 하늘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때 어떤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향기를 찾기 위해 마당으로 향했지요. 허리가 굽은 늙은 소나무가 보였습니다. 수 백 년은 됨직한 노송이 노란 송화 가루를 날렸던 것일까요. 노송은 누각의 대청으로 굵은 몸을 뻗으며 바람에 가지를 살랑살랑 흔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푸른 바람을 만드는 듯 했습니다. 탁청재에는 푸른 바람과 해맑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흑백 사진속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 모습이 저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습니다. 아마 세속의 찌꺼기가 조금은 씻겼겠지요. 저는 일각문을 넘어 안채로 들어갔습니다. 안채에는 햇살이 가득한 마당과 우물이 있었고 대청에 오르기 편하게 커다란 섬돌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랑채보다 건축연대가 더 오래 되었다고 문화 해설사는 말했습니다. 남으로 향한 일자형의 건물은 경북지방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달리 아래채. 곳간. 사랑채가 일정한 여백을 두고 개방적으로 분할되게 공간을 나누었습니다. 안채의 오른쪽인 서쪽으로는 안 사랑채가 있고. 안채 뒤편에는 별도의 담장을 둘렀으며 그곳에 사당이 있었습니다. 무채색의 목조건물들 속에 유일하게 화려한 색채를 가진 공간이었습니다. 안채를 나와 다시 사랑채를 둘러보았습니다. 사랑채의 창호문 안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귀의 편액이 걸려있다고 합니다. ‘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은 영원도록 변하지 않는 맑고 높은 선비의 절개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삶의 목표 중 하나였겠지요. 저에게 있어 오래도록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개. 즉 신념은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굳이 의(義)가 아니어도 상관없겠지요. 삶에서 중요히 여기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지키려는 태도가 중요할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라 여기고 싶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닐까요. 가끔은 사랑의 감정을 잊어버리고 누군가에게 미운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또 가끔은 누군가에게 험한 말을 던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로 지지고 볶고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네의 삶입니다. 서로 그렇게 복닥거리며 살다보면 미운정도 생기고 고운정도 생긴다고 하지 않습니까. 선생님 저는 백세청풍이라는 구절을 가슴에 담고 이제 그만 대문을 나설까 합니다. 대문을 나서면 키 낮은 돌담을 따라 개평마을의 이곳저곳을 더 둘러보고 싶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하직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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