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요일이다. 아. 아. 비유티플 썬데이. 이런 날은 우선 아침에 무조건 일어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아이들이 들어와 “아빠. 엄마가 일어나래. 세수하고 밥 먹으래.” 해도 일어나서는 안된다. 아침 10시 가능하면 12시까지 버팅기면 더 좋다. 마누라 아내님이 급기야 들어와 이불을 재끼며 “당신 해가 하늘머리에 뜬지 언젠데 안 일어나는 거예욧! 지금 내게 반항하고 파업 시위하는 거예욧?” 하더라도 일어나면 안된다. 왜냐. 지금 나는 행복을 맛보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 행복이 지속되도록 깨어나지 말고 오래오래 맛보아야 한다. 허둥지둥 일어나 직장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되는 오늘의 이 속박 없는 행복을 깨뜨려서는 안된다. 시계불알처럼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불려가고 눈만 뜨면 자석처럼 끌려가던 직장을 버리고 무한대로 잘 수 있는 오늘의 이 수면과 행복. 세상이 무너져도 상관없이 이 방안에서의 가장 자유롭게 풀어지고 헝클어진 이부자리에서 갖는 나만의 이 행복을 나는 절대로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만끽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일어날 수 없다. 잠을 깰 수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 세상이 무너지는데.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날들의 절망을 어디 한두 번 경험했으랴. 더할 수 없는 강압으로 어슬렁 일어나 모래 섞인 밥알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어제 늦게까지 마신 주독이 아직 풀어지지 않았다. “내가 못살아. 허구 헌 날 밤 늦게까지 술 먹고 들어오고 그나마 가족과 같이 식사할 수 있는 일요일 날은 일어나지도 않고. 또 조금 있으면 약속이다. 골프다. 등산이다. 낚시다 무슨 핑계 던 대고 나갈 테지요? 가정이 심심풀이예요? 가장이 뭐냐고요-” 시작이다. 목사님 설교가 시작된 거다. 공자선생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거다. 소쿠리테스의 와이프님이 나타나신 거다. 이럴 땐 빨리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아이고. 참.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사랑하는 여보. 자. 자. 그 예쁜 입술 삐뚤어지니까 일절만 하시고 나 사우나 갔다 올게요. 나의 상속자야. 어디 있느뇨. 준비하거라. 나의 예쁜 공주님 어디 계시나. 아빠랑 목욕이나 하러 산으로 갈까나. 바다로 갈까나-” TV프로에서 결혼하면 하고 싶은 일들 중에 하나를 써보라고 남자들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아들이나 귀여운 딸의 손을 잡고 동네 목욕탕에 가고 싶다는 대답이 많이 나왔다. 그 기사를 보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들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안심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나는 일요일이 되면 다섯 살 난 아들의 손을 잡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사우나에 간다. 나도 가정을 가지고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다는 보통사람의 행복을 누구에겐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여자는 이 야릿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놈이 조금 크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같이 목욕하러 가던 생활이 끊어 졌지만 행복했던 날들의 한 날. 공공의 추억이 지나간다. 함양 목욕탕 원조는 임원탕이다. 그 다음 대원탕 덕일탕 금호온천 태양탕 삼일탕 대중탕 등이 있었던 것 같다. 목욕탕도 역사 왕조처럼 흥망성쇠 하여 지금은 몇 몇 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 30년 함양 사람들은 그곳에서 기쁘게 기쁘게 목욕을 했다. 그 대중목욕탕들이 없었다고 생각해보라. 그 끔찍한 때를 어디에서 씻겨낼 수 있었단 말인가. 젊었던 돈 받던 주인아저씨가 지금은 70 가까운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으니 또 꼬마였던 나도 이제 어른이 되고 가정을 갖고 아들에 딸을 데리고 오는 나이가 되었으니 세월 참 빠르다. 옛날에는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 차지하느라 눈치보고 빈 수도꼭지 차지하느라 싸우기도 했다. 비누도 치약도 가져가지 못하게 다 끈으로 묶어놓거나 한쪽에 고정시켜 놓았다. 소금으로 박박 문지르던 손가락 칫솔. 지금은 5층 건물의 헬스장과 최신식 시설을 갖춘 중앙레스파 사우나가 있고 그 옆으로 모텔과 같이하는 하얏트 사우나가 생겨 함양사람들도 도시 사람들 못지않게 헬스도 하고 사우나도 하고 찜질도 하며 문화생활을 즐기게 된 것은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설운동장 쪽으로 참나무 숯불 황토 찜질방도 생겨 인월이나 거창 근처 동네에서 몸을 사정없이 지지려 원정까지 온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수증기로 앞이 보일듯 말듯 한 뜨끈끄끈한 욕탕에서 ‘어. 시원하다.’ 하며 온몸을 담그고 비스듬히 상팔자로 누워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루 황...’ 흥얼거리거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알지 못할 창을 읊조리며 세월아 네월아 몸을 풀고 있는 노인네. 온탕 냉탕 풍덩풍덩 뛰어 다니며 소리지르는 버릇없지만 한없이 팔팔한 어린아이들. 수영 시합한다고 찬 물방울 튕기며 경주하는 중학생들. 뒤범벅된 비누거품을 옆 사람 얼굴까지 튀기며 나 몰라라 씻는 싸가지와 상관없는 사람들. 애 우는 소리와 바가지 깨지는 소리도 가끔씩 들리는 목욕탕은 그야말로 잘 울리는 시장판 코러스 대중 음악의 전당이다. 때밀이 아저씨. 이 분이야 말로 목욕탕 역사의 산 증인이며 실제 주인이다. 반바지 차림으로 실내외를 종횡무진 다니며 손님에게 큰소리치는 무서운 관리감독관이다. 그러다 ‘때 밀어 주세요.’ 라고 부탁하면 거침없이 나를 간이침대에 눕혀놓는다. 소 잡는 사람처럼 준비물을 갖다 놓고 탁탁 때밀이 수건을 두세 번 두들기고 내게 덤벼든다. 그때부터 나는 그야말로 시체다. 나를 고기 덩어리 다루듯 옆으로 눕히고 젖히고 엎어놓고 뒤집어 놓고 시체 다루듯 마구 다룬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나의 사타구니를 사전 예고도 없이 제멋대로 습격하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물건을 다루고 뜨거운 물을 쏟아 붓는다. 그 사람 앞에서는 부자도 대통령도 애비도 없다. 모두가 그저 만원의 가치를 가진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는 때를 미나 봐라 했다가도 목욕탕에 오면 손가락 하나 꿈쩍이고 싶지 않는 <때밀이 중독증>에 걸려 슬슬 아저씨 곁으로 가 다시 부탁한다. 한번 때 밀어 본 사람은 자기 손으로 결코 때 밀고 싶지 않는 게으름뱅이로 전락하게 된다. 저쪽에서 서너 명의 건장한 사나이들이 들어온다. 시끄럽던 목욕탕 안이 갑자기 조용해진다. 우람한 체구의 사나이들이 들어와 멋모르고 서있는 나를 앞뒤로 막고 내 옆에 서서 샤워를 한다. “여보슈. 젊은이. 넓은 저쪽도 많은데... 이크!” 나는 말을 꺼내다 급히 입을 막는다. 으악! 팔뚝이며 등판이며 가득 이 무슨 호랑 빗살무늬냐. 용? 뱀? 호랑이? 아이고. 온몸 전체를 화판으로 삼아 검푸르딩딩 문신한 깍두기 아저씨들. 우우- 머리카락이 갑자기 일어서며 온몸에 살이 돋는다. 말로만 듣던 그 아저씨들이 함양에도 있단 말인가? 아이고. 잘못하다간 사단난다. 몸매가 부실한 나는 그야말로 사면초가.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목욕 중도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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