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에게 책 한 권을 보내고 우체국 현관을 나설 때였다. 검은 건물이 눈앞을 가로막아 섰다. 학사루였다. 항상 같은 자리.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누각이 오늘도 나의 마음을 잡는다. 발걸음을 작은 도로를 건너 학사루로 향한다. 함양 우체국 앞에는 학사루가 있다. 이층 누각은 지붕에 검은 기와를 얹었다. 처마에는 오방색으로 곱게 단청을 하였다. 나는 붉은 칠을 한 굵은 기둥들을 쓰다듬으며 누각을 둘러본다. 누각의 왼쪽에는 은행나무가 있고. 주춧돌 사이에는 보랏빛 제비꽃이 봄 햇살에 올망졸망 모였다. 그 옆에는 키 작은 민들레가 얼굴을 노랗게 물들이며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학사루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90호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지방관리가 피로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몸과 마음을 달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고운 최치원 선생이 함양(당시는 천령군天嶺郡) 태수로 부임해 와서 자주 올랐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 옆에 객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 서쪽에는 청상루. 남쪽에는 망악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1692년(숙종18) 중건하여 이후 수차례 개보수를 거쳐 1979년 군청 앞 현 위치로 옮겨졌다. “누(樓)”란 멀리 넓게 볼 수 있도록 이층으로 지어지는 목조 건축물을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누의 대청에 올라서면 사방의 경치까지 볼 수 있다. 그러니 특권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장소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슬픈 이야기가 하나있다. 영남 성리학자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이 이곳 현감으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올라 유자광(柳子光)의 시가 적힌 현판을 보게 되었다. 김종직은 “소인배의 글이 걸릴 수 없다”고 노하며 당장 떼 내어 불지르게 했다. 이 사소한 일이 훗날 연산군 4년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요인이 되었다. 유자광은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러던 중 김종직이 죽고.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 사건이 터졌다.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그의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던 것이다. 그것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연산군을 충동하였다. 그리하여 김일손 등 사림파 30여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 때 이미 죽은 김종직의 시신을 무덤에서 다시 꺼내 시체를 참(斬)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치란 무서운 것이다. 하물며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의 사랑을 받으면 그 왕의 제위기간 동안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은 권력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세습되던 왕의 자리는 없어졌으며. 민초들은 지도자를 직접 뽑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함양은 또 한 번의 군수선거를 앞두고 있다. 삼 년 동안 세 번의 군수선거를 치르는 셈이다. 군수임기는 4년이다. 하지만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벌써 두 명의 군수가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래서 군수 직은 현재 비어있다. 이제 권력은 누구만의 특권이 아니다. 또한 정치인이나 공직에 있는 사람도 비리를 저지르면 민초들의 비난을 받아 권력이 사라진다. 민초들은 싫던 좋던 정치에. 행정에 무관심 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학사루 또한 더 이상 특권자의 장소가 아니다. 누구나 쉽게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층 대청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은 단단한 자물쇠로 채워져 있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어느 하루쯤은 누각의 대청에 오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자물쇠가 열리는 날. 대청에 서서 느티나무에 눈높이도 맞추어보고 먼 지리산 자락도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바람에 세수도 해 보고 그리운 사람에게 안부 전화도 해보고 싶다. 학사루의 대청에 올라 그리 해 보고 싶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