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대표는 대통령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TV에서나 볼 수 있는 높으신 분이다. 주민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의논하고. 보살피고. 가장 친숙한 사람은 바로 그 마을의 이장. 함양군에도 200여명의 이장들이 마을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그 중 휴천면 한남마을 박찬조(62) 이장은 특별하다. 예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들어지면서 큰 기관의 장으로서 생활하다 귀촌 4년만에 40가구 마을 주민들의 심부름꾼으로 이분들을 떠받들며 생활하고 있는 박찬조 이장. 평생을 푸른 바다에서 일하다 오지로 꼽히는 함양 휴천면에 자리를 잡은 바다사나이 해랑(海郞) 박찬조 이장. 바다를 주름잡던 그가 지리산 자락에 들어와 이장이 되기까지 민물에서 태어나 짠물에서 생활하다 다시 민물로 들어온 연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50년 유림면에서 태어나 유림초등학교와 진주 중고등학교를 거쳐 한국해양대 기관학과를 졸업한 후 해군 중위로 전역. 이후 바다 사나이로서 해운회사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간다. 전국선원노동조합연맹 부위원장이나 한국해기사협회 회장 등의 이력도 바다를 누비던 그가 가졌던 이력 중 하나다. 그는 2007년부터 한국해양수산연수원 원장으로서 수많은 바다 관련 인력들의 교육에도 큰 힘을 보탰다. 해양수산연수원은 준 정부기관으로서 해양 종사자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 등을 정부로부터 위임받아 우리나라가 해양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 나가는 중요한 기관의 장으로서 근무했었다. 2008년 퇴직 후 그는 2009년 귀촌을 결심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를 고향으로 이끈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연로하신 부친의 몸이 불편했기 때문. 그렇게 귀촌해 부모님과 생활했으며 지난해 부친께서 돌아가셨다. 박 이장은 "내가 장남이 아닌데도 형님이 미국 이민을 가서 장남 노릇을 하게 됐다. 고향으로 귀촌하는 것은 ‘인간 본능’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함양지역에서 박찬조 이장의 일가는 유명하다. 어린 시절 출향했지만 그의 부친 박근서씨는 공무원으로서 최연소 면장이라는 타이틀까지 가지고 있었다. 또한 8남매의 가장으로서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멀리 고향에서 터전을 일궈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는 “아마도 저의 부친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더욱 많을 것이다. 대단하신 분이다. 35세 최연소 면장까지 지낸 분으로 또한 8남매 모두 대학 보내고 출가시키신 분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첫 귀촌은 가족들 대부분이 반대를 했다. 농촌 생활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가족들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귀촌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그지만 외부와의 단절로 인해 한때 우울증을 앓기도 하는 등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내가 그동안 전공으로 했던 것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삶. 그동안 쌓았던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고 그 지식들은 고착화되어 갔다. `이러다 바보가 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한편으로 내가 그러기 위해서 들어온 것 아닌가. 여유를 가지기 위해서 들어온 것인데. 이 같은 생각으로 초심으로 돌아가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설명했다. 시골로 내려온 그에게도 전공인 기관학을 살려 일 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 노인분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기계나 전기 등을 수리해 주며 이웃과 더욱 끈끈한 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는 "전공인 기관학은 전기와 기계 등 모든 것을 두루 다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한번은 이웃 할머니께서 전기가 안 들어와 밤새 추위에 떨었다며 울면서 찾아오셨다. 오래된 집이다 보니 엉망인 배선문제로 인해 곳곳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고 자칫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두꺼비집 등을 깨끗하게 손봐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의 집에는 작업공구부터 시작해 용접기까지 웬만한 기계는 모두 고칠 수 있을 정도의 도구들이 다 갖춰져 있다. 마을 분들과 친해진 이후 그에게 시련 아닌 시련이 다가왔다. "어느 날 어르신들이 작당을 했는지 짝을 이뤄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장을 하란 거였다. 많이 사양했지만 `잘못하면 쫓겨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이장으로서 임명장을 받고 본격적인 업무를 보게 된 박찬조 이장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한다. 그는 귀촌의 성공 포인터로 첫째로 마을 분들과의 친화를 꼽았다. 그는 동네 어르신들을 `내 어머니 내 아버지`라고 칭했다. 그는 "마을에 모임이 있으면 같이 술 마시고 놀고 스스럼없이 먼저 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휴천면 남호리 한남마을은 40가구 정도의 작은 가구지만 역사 속에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어귀에 있는 나박정은 세종왕자 한남군이 계유정란에 연루돼 유배된 새우섬에서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 독서를 하며 단종을 그리워 한 곳이다. 이곳은 최근까지 제대로 된 시설도 없이 방치되어 오다 지난 3월15일 정자 준공식을 가졌다. 이것이 박찬조 이장이 이장으로서의 첫 대형 결실이기도 하다. 박 이장은 "이장으로서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이다. 어르신들의 말을 귀 기울려 듣고. 먼저 나서서 일을 하고. 챙겨주는 것이 이장의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강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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