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24편  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살아간다. 추억은 언제나 소중하다. 힘들고 어려울 때면 그 옛날의 추억을 곱씹으며 다시 한 번 일어서는 힘을 얻는다. 그 소중한 추억의 한 자락을 잡기에 가장 좋은 것이 오래된 사진첩이다. 맨 몸을 들어내 놓고 찍은 돌사진부터 코 흘리게 초등학교 입학사진. 조금은 커서 찍은 졸업사진에. 멋진 학사모를 쓰고 찍은 대학 졸업사진까지. 그 사진 속에는 친구들과 천진하게 뛰놀던 시절에서부터 다양한 나의 일대기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울고 웃을 수 있는 옛 사진 한 장. 디지털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전 사람들은 누구나 특별한 날을 특별하게 보내고 특별하게 남기기를 원했고. 그 특별한 추억을 남기는 수단으로 사진을 사진관을 찾았다. 40여 년간 함양 군민들의 추억과 함께 해온 곳이 있다. 성광사진관 석대성(68) 사장. 1971년 문을 연 사진관은 현재까지 여전하게 군민들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으면서도 정작 카메라 앞에 서기를 꺼려하는 석대성씨를 반 강제로 카메라 앞에 세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흑백사진이었지. 무거운 카메라를 짊어지고 수십km를 걸어서 동네 곳곳을 찾아 다녔어. 자전거도 귀했던 시기였지. 휴천과 유림을 거쳐 생초까지 그 먼 거리를 출장 다녔지” 석대성씨도 추억의 흑백사진처럼 그때의 모습을 하나씩 들춰냈다. 9남매 중 장남인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 ‘대한 브로마이드’라는 곳에서 사진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의 사진관 한 켠에는 당시 그가 찍었던 탤런트 `이순재`의 젊었을 적 사진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후 군대를 다녀와서 고향인 함양에 현재의 성광사진관 문을 연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때부터 42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당시 카메라 한 대에 논 세마지기 가격이었지. 돈이 없는 사람은 사진관도 할 수 없었어. 모두 일본제품이었지. 우리나라에서는 만들지 못했으니 당연히 비쌌던 거지” 사진관 곳곳에는 그의 손때가 묻은 장비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는 이기지 못하는 듯 컴퓨터가 눈에 띄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에게는 컴퓨터가 친숙하다. 일명 ‘뽀샵’이라고 불리는 포토샵 등 사진 후보정 프로그램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90년대 초 앞으로 디지털 사진이 대세라는 생각에 서울에 올라가 컴퓨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아마도 함양에서 가장 먼저 컴퓨터 그래픽을 쓴 이가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사진 한 장에 ‘십오원’이었다. 그 시절에는 상당히 고가였다. 고가인 만큼이나 사진의 인기도 대단했다. 그래서 특별한 날에만 찍을 수 있었다. 사진관이 가장 바쁜 시기는 졸업 시즌. 끝이 없이 밀려오는 손님들로 인해 밤을 새서 작업을 해야 했다. 석씨는 “낮으로는 사진을 찍고. 밤새 그것을 인화하고 나면 아침에 또다시 손님들이 몰려왔다”며 바빴던 일상을 회상했다. 바쁠 때는 인화한 종이가 마르지 않아 연탄불에 굽듯 말려서 주기도 했다. 졸업식날 학교로 출장을 가는 날이면 함양고 은행나무 앞에는 줄이 길게 섰다. 모두가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디지털 카메라와 핸드폰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사진은 찍고 바로 지울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전에는 필름 가격이 비싸 눈이라도 한번 깜박이면 다시 찍기 어려웠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카메라는 물론 사진 인화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진 현상을 위해 일본까지 보낸 후 보름 정도 후에나 받아 볼 수 있는 수고로운 때도 있었다. 지금도 사진관을 운영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찾아오는 손님들이 별로 없어 소일거리로 하고 있다. 가정마다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고 손쉽게 찍을 수 있는 핸드폰을 들고 다니니 사진관의 일거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곳 성광사진관을 찾는 이들이 있다. ‘사진관 아저씨’를 찾는 이들. 옛적 결혼사진을 찍었던 이가 아들의 결혼사진을 부탁하기도 한다. 까까머리 학생들의 졸업사진에서 환갑 사진을 부탁하는 이들이 찾는다. 간혹 찾는 이들이 있어 아직도 문을 닫지 못하는 것이다. “옛날부터 찾아오던 사람들이 멀리서 찾아왔는데 어찌 돌려보내겠는가” 현재 함양교회 장로로 봉사 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석대성씨는 72년 부인 엄숙희(65)씨와 결혼했다. 사진관을 연 직후였다. 그는 “우리 아내가 나보다 훨씬 사진 찍는 기술이 좋다”라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슬하에는 1남1녀를 뒀으며 장남은 행정공제회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딸은 진주에서 결혼해 살고 있다. 사위가 경상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온화한 미소의 50대로 보이는 석대성씨. 비결에 대해 “항상 즐거운 곳에만 가게 된다. 돌잔치. 결혼식. 회갑잔치. 항상 행복한 곳만 찾아 행복한 순간만을 찍으니 덩달아 행복해 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한다. 40여년을 이어온 성광사진관 석대성 사장을 찾는 이들은 줄었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군민들의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하며 오늘도 추억을 간직하려는 이들을 위한 소중한 사진을 선물해 주고 있다. <강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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