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면에 있는 광풍루光風樓를 지나 꺾어 든 길에서 사천왕을 만났다. 사천왕은 파출소 맞은편에 있는 일주문 속에 서있었다. 질박하게 채색된 단청이 없었다면 여염집 대문처럼 보이는 산문山門이었다. 일주문에는 법인사法印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층으로 지어졌으며 위층에 동종이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종각의 역할을 하는 듯 했다. 속俗과 성聖을 구별하듯 옆으로 흙과 돌로 만든 낮은 담이 절집을 휘둘렀다. 그리고 발돋움을 하고 바라본 절집 마당에는 늙은 느티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나무는 속세의 일이 궁금한지 담을 넘어 허리를 뻗었다. 파란 하늘을 이고 나무가 나를 내려다봤다. 물이 오른 검은가지는 봄바람에 팔랑팔랑 거렸다. 마치 나를 향해 잠시 쉬어가라는 손짓 같았다. 활짝 열린 산문을 넘어 절 마당에 들어섰다. 소담스런 절집이었다. 눈앞에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이 펼쳐졌다. 아미타여래가 머물며 법을 설하는 곳이 극락세계이다. 그럼 저 문을 열면 극락으로 갈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문을 열고 극락보전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법당의 중앙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보물1691호)이 계셨다. 좌측에는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가 있었고 우측에는 지장탱地地藏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97호)이 있었다. 그리고 더 깊은 우측에는 감로탱甘露幀(보물 1731호)이 보였다. 그곳은 자그마한 박물관이었다. 아미타여래는 1657년 영규靈圭와 조능祖能 등이 조성했다. 전체적인 비례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안으면 한 아름에 안길 것 같은 풍채였다. 수인手印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으로 왼손은 내려서 손바닥을 위로하였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서 손바닥이 앞으로 살짝 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각각 중지와 엄지를 맞대었다. 원만한 상호에 이중으로 법의를 걸쳤으며 오른쪽 어깨 앞쪽으로 살짝 걸쳐 내린 대의는 끝단이 약간의 곡선을 이루었다. 다리를 덮은 옷의 주름과 오른쪽 다리 소매 자락의 표현이 다른 불상에서는 흔하지 않은 특징이라고 한다. 아미타여래가 자리 잡은 곳은 깊은 산중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넓은 터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왁자지껄한 저잣거리 한가운데에 묵묵히 자리를 틀고 앉으셨다. 그리고 오면 오는 데로 가면 가는 데로. 아무런 조건 없이 미혹한 중생을 맞이하고 계셨다. 나는 금빛의 부처님과 눈을 맞추었다. 부처님은 누구에게 그러하듯 붉은 입술을 살짝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속에서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도 무애無碍의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아미타여래는 “지극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염念하면 극락에 태어날 것이다”고 했다. 수행의 방법을 몰랐던 민초에게 염불(念佛)을 통한 깨달음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극락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선업을 쌓아야 했으며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해야 했다. 조상님들은 삶의 무게에 눌려 휘청거릴 때마다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말을 한숨처럼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렇게 나쁜 업 쌓기를 멀리하고 아미타불을 부르면 죽어서 반드시 극락에 가리라 믿었다. 극락왕생이라는 약속은 힘든 삶의 보답이요. 삶의 중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극락에 간다고 해서 삶이 완성되는 것일까. 옛 선사는 ‘자신에게 참 진리가 있다면 삶도 죽음도 없다’고 했다. 참 진리를 알면 생과 사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참 진리란 무엇일까. 나는 지금의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참 진리라 여기고 싶다. 삶이란 사람들과 더불어 지지고 볶고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과의 도리에 맞게 살아가는 것.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참 진리에 이르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생을 살아간다면 굳이 아미타불을 염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리라. 어쩌면 극락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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