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가 내린다. 잿빛 도로는 빗물에 토닥토닥 젖는다. 길이 마치 들기름을 발라놓은 듯 자르르 윤기가 흐른다. 반질반질한 길을 따라 무작정 산속으로 파고든다. 산골짜기는 온통 안개…. 안개가 점령해 있다. 모듬모듬 모여 있는 안개를 헤치며 도착한 곳은 ‘수동면 우명리’다. 작은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오래된 풍경을 만난다. 집이 두어 채 보이고. 작은 지붕 속에 있는 돌부처님이 보이고. 조금 떨어진 들판에 있는 오래된 석탑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승안사지昇安寺地이다. 나는 오래된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승안사의 금당과 요사채는 사라졌다. 절 집의 화려했던 시절 이야기도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사암산에 승안사昇安寺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어디에도 그 이후의 절 집 이야기는 없다. 다만 숭유억불 정책으로 조선중기 이후에 폐찰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모두가 다 증발해 버린 것은 아니다. 까마득한 세월동안 세상의 풍파를 묵묵히 바라보았을 석불과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오래된 석조여래좌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33호)을 향해 합장을 한다. 석불은 고려시대에 많이 조성된 거불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런데 가부좌로 있어야 할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하반신이 땅속에 묻혀 버린 것이다. 상반신 또한 온전하지 못했다. 머리 부분은 신체와 비례가 맞지 않았고 머리카락의 표현도 분명하지 않았다. 훨훨 정기를 뿜으며 산천의 기운과 함께 어우러져야 할 거불은 키 낮은 지붕아래 앉을 자리 하나만을 얻은 채 깊은 시름에 잠겨있는 듯 싶다. 대체 승안사 스님은 주불을 남겨두고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삼층석탑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보물 제294호이다. 석탑도 고려시대에 조성되었으며 원래의 자리에서 두 번이나 옮겨졌다고 한다. 신라의 탑 양식을 따르면서 장엄한 장식 구성에 많은 힘을 기울인 흔적이 보인다. 위층 기단의 맨 윗돌에는 연꽃조각을 새겨 놓았는데. 이러한 장식은 보기 드문 모습이다. 기단에는 한 면에 두 구씩 불佛·보살상이나 비천상飛天像을 양각하여 모두 8구의 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인물들은 공양을 드리거나 음악을 연주한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으로 되어있다. 초 층 옥신 사면에 사천왕상이 양각되었다. 오래된 화강석에는 파릇파릇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다. 색이 바래져 버린 늙은 이끼는 탑의 표면에 납작하니 붙어 단단한 돌과 하나가 되었다. 그 속에서 하얀 꽃잎을 열었다. 아마 수 백 년의 시간이 그렇게 박제되어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연히 돌부처님과 탑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한다. 합장은 우상숭배의 행위가 아니다. 하심下心으로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미도 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으니 까만 번뇌로 얼룩진 마음이 보인다. 그것을 탁탁 털어낸다. 털어도털어도 오래된 번뇌는 잘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을 낮추어라’는 법法 하나를 얻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성철스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뜻을 알지 못한다. 다만 마음이 평화로우면 산은 산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이고. 물은 물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인다. 반대로 마음이 어지러우면 산과 물은 아무리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다는 뜻과 마찬가지 아닐까. 흔히 절이란 불상을 모시고 스님들이 불도佛道를 닦으며 법을 펴는 집을 가리킨다. 딱히 이 조건을 모두 갖출 필요가 없을 것이다. 승안사지에는 거대한 돌부처님이 계시고. 공양을 올리는 보살과 음악을 연주하는 비천이 있고.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있다. 그리고 가끔은 나 같은 사람이 찾아와 법 한 구절을 얻어가기도 한다. 그러기에 승안사지에는 아직도 승안사가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안개가 서서히 북으로 진군해 간다. 나는 오래된 풍경을 남겨두고 다시 시끄러운 저잣거리로 향한다. 인연이 허락하는 어느 날. 승안사지에 한 번 더 오고 싶다. 그리고 솔바람 향기를 맡으며 삶에 대한 화두 하나 주워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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