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두터운 구름으로 해를 감추었다. 금방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다. 바람이 훠이훠이 구슬픈 소리를 내며 산골을 휩쓸고 다녔다. 휘적거리는 바람 따라 좁은 산길을 올라가니 ‘고담사古潭寺’가 모습을 드러냈다. 몇 년 전 여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당당한 일주문도 번듯한 법당도 이렇다 할 요사채도 없었다. 그리 작지 않은 연못에는 푸른 연 잎사귀들로 가득했고. 개구리가 신난 목소리로 와글와글 울어대고 있었다. 이제는 ‘관음전觀音展’이라는 현판이 달린 아담한 법당이 생겼다. 관음전 오른쪽에는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보물 제375호>이 있다. 여래는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러나 천왕봉은 하얀 보자기 같은 운무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마애불상 앞에 섰다. 그곳에는 천년의 시간이 곰삭아 있었다. 마애불의 발 밑을 보니 연기가 모락모락 연화대를 기어오른다. 누군가가 향을 피운 모양이다. 향내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그 순간 무엇인지 모를 그리움에 심장이 울컥거렸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애불과 나는 어떤 인연이었을까. 마애불은 거대하고 강건했다. 그리고 화려했다. 상호는 완만하며 온화한 느낌을 주었다. 입술은 붉은 주홍색이 칠해져 있어 마치 부처님이 야시시한 미소를 흘리는 듯 했다. 그 모습에 나의 양 입술 끝도 저절로 올라갔다. 커다란 바위 면을 깎아 부조로 조성한 불상은 그 키가 5.80m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고려시대에 제작되어 광배. 불신.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직사각형의 거대한 체구와 여기에 걸 맞는 큼직한 발 등은 금강석 같은 불상의 면모를 잘 나타내었다. 온 몸을 감싼 광배에서는 조롱조롱 구슬소리가 울릴 것 같았다. 이글거리는 불꽃무늬와 하늘거리는 옷자락은 마치 하늘에서 방금 내려와 언제라도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릴 듯한 모양새였다. 왼손은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세운 채 손바닥을 밖으로 향했다. 부처님이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 주겠다’는 의미의 시무외인施無畏印이다. 오른손은 밑으로 내리고 역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했다. ‘중생의 소원을 이루게 해 주겠다’는 여원인與願印이다. 두 손 모양은 모두 중생을 돕겠다는 부처님의 약속이었다. 중생들은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부처님 발 밑에서 소원을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마애불은 천년의 시간동안 무거운 소원들을 끓어 안고 오롯이 지탱해 왔는지도 모른다. 나도 소원하나를 부처님께 얹었다. 그때였다. 하얀 소금 같은 눈이 싸르락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쏟아졌다. 싸리 눈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하얀 꽃잎이 내리듯이 바람에 날렸다. 바람 따라 나붓거리는 하얀 눈가루를 부처님의 응답으로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을 것이다. 비구니 스님께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보았던 강아지의 안부를 물었다. “그 녀석 촐랑거리고 다니더니 절에 들어오지 않네요” 벌써 한참이 되었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내 뒤만 쫄랑쫄랑 따라 다녔다. 멍멍 짖지도 않았다. 마냥 꼬리를 흔들며 나의 발꿈치를 따라 촐랑거렸다. 그리고 절을 벗어나기 위해 걸어 나오니 입구에 서서 ‘잘가라’는 듯이 한참을 서 있었다. 홀로 남겨두고 가는 가족처럼 가슴 한곳이 아련했었다. 우연을 앞세우고 만났던 그 녀석은 차가운 겨울날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모두가 우연이었다. 어느 날. 지리산을 보러 왔고. 그 길에서 고담사에 들렀고. 또 정이 많은 강아지와 마애불을 만났다. 그리고 몇 년 뒤. 나는 함양으로 이사를 했다. 그 모든 일이 ‘우연’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이루어졌다. 어쩌면 우연은 필연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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